지붕이 무너져 내린다고 치자. 이 문제를 서까래에만, 대들보에만, 기둥에만 해결하라고 할 순 없다. 모두가 나서야 한다.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환경부, 환경운동가, 기후전문가에게만 맡길 순 없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인권, 언론, 도시, 방재, 여성, 장애, 노동, 청소년, 보건, 종교, 교육 등 모든 분야가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한편에선 아직도 기후위기를 부인, 축소, 낙관하는 목소리가 있다. 기온을 3.5도 수준에서 ‘최적화’하여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다른 한편으론 기후위기가 인류문명의 종말로 이어질 거라고 단언하는 소리도 나온다. 어느 쪽이 옳은가. 전자는 명백히 틀렸고 후자는 뉘앙스 있는 추가설명이 필요하다.
기후위기의 본질은 불확실성에 있다. 나빠질 것은 분명한데 인류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전대미문의 사태여서 얼마나 악화될지, 어떤 식으로 악화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확실한 점도 있다. 삶이 팍팍하고 버거운 사람들은 기후위기로 몇 배나 더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기후위기는 현존하는 불평등과 사회모순을 더 첨예하게 악화시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도시 쪽방 주민, 홀몸 노인, 환기 불량 주택 거주자, 저소득층, 기초생활수급자, 에너지 빈곤층, 야외 건설·산업 노동자, 비닐하우스 이주노동자, 노약자, 만성질환자, 심신 쇠약자, 정신질환자, 상습 침수지역 및 녹지 협소 지역 주민,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 주민들은 마치 남아공 흑인들이 인종분리정책의 희생이 되었던 것처럼 ‘기후위기 인간차별’의 직격탄을 맞을 것이다.
하루 종일 냉방시설에서 냉방시설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살 수 있는 극소수와, 다양하게 폭염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나머지로 이루어진 새로운 기후계급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기후위기를 경험하는 불평등의 정도를 따지는 ‘기후 지니계수’ 같은 지표가 나올 날이 머지않았다.
‘문명의 종말’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인류가 적어도 이번 세기 내에 물리적으로 종말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뒤집히는 상태, 통상적 사회질서가 크게 무너지고 법치의 근본이 흔들리는 ‘기후 아노미’가 곧 문명의 붕괴다. 현재 대학생이 쉰살이 되기 전에 홉스가 말했던 아수라장 같은 세상이 올 수도 있다.
기후위기가 누구 책임인가. 여러 겹이 쌓여 있는 구조다. 첫째 겹은 현대적 삶의 양식 자체다. 자동차를 타고 에어컨을 돌리고 육식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점만 얘기하면 서로 다른 책임의 비중이 사라진다.
둘째 겹은 산업혁명 및 그것과 동반된 식민지배였다. 서구 제국들은 천연자원과 면화와 설탕과 차와 고무를 위해 인도, 멕시코,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카나리아, 케이프베르데, 마데이라, 서인도, 가이아나, 말라야, 인도네시아 등지의 산림과 자연을 철저히 유린했다. 비서구권의 지속가능성을 황폐화하면서 서구로 부를 이전시킨 것이다. 일제 강점기엔 어땠을까.
셋째 겹은 화석연료의 위험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후에도 수십년 동안 사실을 부인하고 왜곡하면서 수익에만 몰두해온 엑손모빌과 같은 에너지 악덕기업이 있다. 석탄산업, 발전산업도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겹은 지정학적 갈등이다. 최근 발생한 브라질의 열대우림 화재가 전형적인 사례다. 미-중 무역갈등으로 돼지고기 최대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의 돈육 가격이 크게 올랐다. 그런데 중국은 돼지 사료용 대두를 주로 수입한다. 브라질은 미-중 갈등을 틈타 대중국 대두 수출을 늘려 미국을 이미 추월하였다. 그 와중에 우파 정부가 아마존 우림의 방화를 방치, 조장한 것이다. 이런 식의 국가경쟁으로 온실가스는 늘어만 간다.
이 네 겹의 밑바탕에는 국가들의 의무 불이행과 개인 차원의 심리가 깔려 있다. 지난주 발표된 ‘기후위기 선포를 촉구하는 지식인·연구자 선언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7위, 기후악당국가의 불명예를 안고 있으나 석탄화력 발전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많고 폐쇄 계획은 더디다.” 전세계가 기후비상사태를 선포하는데도 우리 정부의 위기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 차원의 심리도 인식전환을 가로막는 장애다. 인지적으로는 심각성을 이해하지만 정서적으로 실감하지 못하고 행동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기후나 환경을 이상주의적 성향을 지닌 일부 녹색 ‘마니아’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의식의 칸막이를 당장 허물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기후위기에 대해 아무리 경고를 들어도 그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하루하루 살기에 바빠 그런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서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느낄 정도가 되면 이미 때는 늦었다. 이런 상황을 ‘기든스의 역설’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역설적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은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기후위기가 큰 딜레마라고 지적한다. 기후위기의 실상을 곧이곧대로 전달하면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체념하고, 동기화된 망각기제를 발동시켜 끔찍한 메시지를 의식에서 밀어낸다. 하지만 전기 아끼기, 승용차 덜 타기 등 개인적인 실천 메시지만 전달하면 부담은 덜 되지만 기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순 없다. 국가 정책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위험 인식도 문제다. ‘설마 내가 사는 동안은 괜찮겠지’ 하는 식의 현재편향과, 미래에 대한 과도한 가치폄하도 나타난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추세를 감지하기 어렵게 진화해왔다. 하루 이틀 날씨가 좋으면 ‘기후위기라 해도 별문제 없구나’ 하고 걱정을 내려놓는다. 인류세를 논할 정도로 인간이 스스로 지질적 힘으로 등극했지만 지질적 차원의 시간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한계가 인간 종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의 이런 특성이 인권에도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눈앞의 직접적 차별에 대해서는 그렇게 감수성을 강조하면서도, 인류의 장기적 실존에 대한 감수성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권침해의 가해자를 찾는 데엔 열심이지만 가해 원인을 찾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세대간 기후정의를 이야기해야 한다.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세대, 다시 말해 가장 오래 살아갈 세대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더 많이 부여해야 한다. 엉망이 된 지구를 후대에게 물려주는 기성세대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청소년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는 게 백번 옳다. 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어른들이 따라야 한다.
그것의 첫걸음이 오는 9월21일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지자체 행정과 모든 인권교육에도 기후위기를 포함시켜야 한다. 잘만 하면 기후위기가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종적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적 축적물로서, 사회적 산물로서의 자기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기존의 인권을 넘어 새로운 인권담론이 출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한국인권학회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