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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2 19:44 수정 : 2015.10.23 14:49

송혜교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초반 연기 논란 간 데 없이
그에 대한 찬사가 쏟아진다
늘 잘해왔던 걸 잘해보이자
난 데 없이 ‘재발견’을 외치며…

작년 말의 일이다. 영화관에서 혼자 <레 미제라블>을 보고 나오는 길에, 같은 관에서 영화를 본 한 커플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게 되었다. 심야 상영이었던 터라 관객도 많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도 셋뿐이었는데, 데이트중인 커플들이 흔히 그렇듯 옆에 있는 나는 전혀 안중에 없는 두 사람만의 오붓한 대화가 시작됐다.

“야, 커트 러셀 누가 섭외한 거냐? 노래 너무 못하던데?”

“그러니까. 클로즈업은 또 얼마나 잡는지, 보는 내내 부담스러워서.”

대화에 끼어들어 “러셀 크로겠죠. 이 영화에는 커트 러셀이 출연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마디 얹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이어질 민망하고도 어색한 침묵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내가 혼자 남자를 정정해 주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는 동안, 커플의 대화 주제는 팡틴 역의 앤 해서웨이로 넘어갔다.

“앤 해서웨이 연기 많이 늘었더라?”

“진작에 이런 거 좀 찍지. 그동안 왜 그런 영화들에만 나왔대?”

가만, ‘그동안 그런 영화’라니, 연기가 ‘늘었’다니? 커트 러셀과 러셀 크로를 헷갈리는 거야 외국 이름이니까 그럴 수 있지 했는데,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팡틴이란 캐릭터 자체가 연기력을 ‘과시’할 기회가 많은 배역이라 연기가 눈에 더 잘 들어와서 그렇지, 앤 해서웨이는 언제나 자기 몫은 너끈히 해내는 배우였다. 죽은 게이 남편의 애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받던 중년 여인을 연기해 낸 <브로크백 마운틴>이 2006년, 언니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재활원에서 나온 약물중독자 역을 한 <레이첼, 결혼하다>가 벌써 2008년 영화였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그런 영화’ 축에 낄 법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도 그의 연기는 호평의 대상이었다. 연기력이 늘었다는 말이 늘 칭찬인 건 아니다.

비슷한 경우가 그해 봄에도 한차례 있었다. 2012년 3월 <화차>가 개봉하자, ‘김민희의 재발견’ 운운하는 이야기가 도처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가 드라마 <굿바이 솔로>로 ‘재발견’이란 말을 처음 들었던 게 2006년이었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이미숙에게도 밀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이며 또 ‘재발견’된 게 2007년, <여배우들>에서 허허실실 극의 빈칸을 메우며 또 ‘재발견’ 소리를 들은 게 2009년이었다. 작품을 할 때마다 ‘재발견’이란 말을 듣는 배우라니. 그렇다면 <화차>는 ‘재-재-재-재발견’쯤 되려나. 이쯤 되면 ‘재발견’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간 진작에 김민희를 발견 못하고 뭘 했는지를 묻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가장 최근 이 ‘재발견’ 리스트에 합류한 사람으론 송혜교가 있다. <에스비에스>(SBS) 수목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시각장애인 재벌가 상속녀 오영 역이 재발견의 계기였다. 분명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벌써 두번째 리메이크다 보니 원작 일본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의 히로스에 료코, 한국판 리메이크 영화 <사랑 따윈 필요 없어>의 문근영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었다. 함께 출연하는 배종옥이나 김규철과 같은 베테랑들과 한 화면에 나오면 송혜교가 밀리진 않을까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의 결과만 보면 세간의 기대는 가뿐히 넘긴 듯하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방영되는 수요일, 목요일만 되면 인터넷 연예기사가 온통 ‘진정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같은 표현들로 도배가 되고 있으니 말 다 했지. 그가 데뷔 이래 이렇게 많은 연기 칭찬을 받은 적이 있던가.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칭찬 일변도였던 것은 아니라서, 외려 첫 2회분 정도는 그의 연기를 지적하는 의견이 많았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저렇게 굽이 높은 힐을 신고 다닐 수 있느냐’부터,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저 넓은 집 안을 지팡이도 없이 휘적휘적 다닐 수 있느냐’, ‘립스틱 바르는 장면을 클로즈업한 건 간접광고(PPL)를 노린 거냐’는 지적들까지. 마치 ‘어디 시각장애인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연기 지적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누군가 나서서 시각장애인들 중에도 굽 높은 힐을 즐겨 신는 사람이 제법 있다는 점, 그들도 지형지물에 익숙한 집 안에서는 지팡이 없이도 잘 다닌다는 점, 립스틱을 바를 때 입술 선을 손으로 확인해가며 바르는 장면은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점 등을 해명해 준 다음에야, 초반의 연기 논란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건 그에 대한 찬사가 터져 나온 시점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오영이, 십수년 만에 만난 오빠(인 줄 알고 있는) 오수(조인성)에게 마음을 열고 ‘오빠 너를 믿고 싶다. 믿어도 되겠느냐’며 오열하는 장면이 기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공을 들여가며 선보인 시각장애인 연기가 아니라, 조인성과의 멜로가 궤도에 오르며 연기에 대한 칭찬이 시작된 것이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정통 멜로 연기는 <가을동화>가 히트했던 2000년 이래로 지난 13년간 송혜교의 주 전공 분야였다. 새로 선보이는 연기 도전 앞에선 갸우뚱하던 여론이, 늘 잘해왔던 걸 잘해 보이자 난데없이 ‘재발견’을 외치며 그제야 시각장애인 연기도 덩달아 칭찬하는 이 기이한 현상이라니.

생각해보면 송혜교는 늘 그 정도의 연기는 소화해 냈다. 주 전공인 멜로에만 집중해도 됐던 <올인>(2003년)이나 <풀하우스>(2004년)에서의 호연은 말할 것도 없고, 방송사 드라마국 새내기 감독 주준영 역을 맡았던 <그들이 사는 세상>(2008년)에 들어서는 ‘믿고 볼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소수점 단위의 시청률 변화에도 스트레스를 받고, 남자들 천지인 드라마판에서 여자 감독으로 생존하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 주준영은 쉽지 않은 역이었다. 송혜교는 이 까다롭고 낯선 특수 전문직 연기를 손에 잡힐 듯 펼쳐 보였다. 물론 그때에도 시작은 ‘발음 논란’으로 시작했고, 연기가 궤도에 오른 시점엔 시청률이 떨어지는 바람에 칭찬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지만.

하긴, 세상엔 그런 배우들이 있다. 발랄한 이미지와 준수한 외모 탓에 아무리 호연을 펼쳐도 늘 상대적 저평가에 시달리는 배우들. 처음엔 연기 신동 소리를 듣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도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타닉>, <비치>를 거치면서 꽃미남 스타 정도로 이미지가 굳어질 뻔했으니까. 그의 연기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그가 살집을 불리고 미간에 주름을 잡아 “인상이 잭 니컬슨을 닮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갱스 오브 뉴욕>에서야 다시 시작됐다. 멀리 할리우드까지 갈 것도 없다. 장동건 또한 연기력을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친구>,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기 변신 이후의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그냥 잘생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받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이 남들보다 높았던 셈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런 편견은 남자 배우보다 여자 배우에게 유독 더 가혹하다. 얼굴 예쁜 덕에 시에프(CF)나 촬영하고 화보나 찍으며 공짜로 인기를 얻은 게 아니냐는 뿌리 깊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배우들은 종종 기예에 가까운 연기에 도전하곤 한다. 앤 해서웨이는 11킬로그램을 감량한 채 카메라 앞에 앉아 삭발을 하고 울면서 노래를 불러야 했고, 김민희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속옷 바람으로 산장 바닥을 걸레질해야 했다.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웃음과 울음이 기괴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송혜교는 앞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을 연기하며 쇼핑몰 분수대에 빠졌다. 어떤 이들의 자기 증명은, 그렇게나 처절하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엄마, 사람들은 왜 잔잔한 연기로는 좀처럼 연기 잘한다는 말을 잘 안 할까?”

“승한아, 너 <나는 가수다> 기억하지?”

“갑자기 그건 왜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뒤로 가면 갈수록 고음 경쟁에 성량 경쟁이 됐잖니. 잔잔한 노래란 건 모름지기 시간을 두고 곱씹을수록 맛이 사는 데, 청중평가단 투표는 당장에 해야 하잖아? 그런 거야.”

“사람들 참 각박하네.”

“원래 세상이 다 그렇다. 남의 주머니에서 백원 한장 가져가며 좋은 소리 듣기가 그렇게 힘든 거야.”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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