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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03 19:19 수정 : 2015.10.23 14:47

지난달 27일 방영한 <무한도전> ‘뮤지컬 무한도전’ 편에서 극중 정리해고를 당한 정 과장 역을 맡아 눈물 연기를 열연한 정준하.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그는 무한도전 부적응자였다
시청자는 하차를 원했지만
제작진은 그의 적응 함께 고민
결국 완벽한 정착을 도왔다
사람의 잠재력을 속단하는 것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정준하는 회사 건물을 올려다봤다. 10년 넘게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친 흔적은 종이상자 하나 분량으로 너무도 간단히 정리됐다. 그는 이제 더는 무한상사의 과장이 아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막 실직한 정준하는 햇볕이 쏟아지는 한낮의 거리를 걸었다. <무한도전> 8주년 기념 ‘뮤지컬 무한상사’의 1부는 어떠한 반전이나 행복한 2부에 대한 예고편도 없이 그렇게 살풍경하게 끝났다.

“뭐야, 정말 그냥 이렇게 끝나?” <문화방송>(MBC) <무한도전>이라면 정리해고 문제조차 유쾌하게 풀어내리라 생각한 수많은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누군가는 자신의 해고 경험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내가 아닌 동료가 잘린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인터넷 게시판마다 ‘울었다’, ‘보다가 꺼버렸다’, ‘술을 마셨다’, ‘가슴이 먹먹하다’는 소감이 줄을 이었고, 개중엔 ‘정준하 정말로 하차하는 줄 알고 가슴이 덜컹했다’고 말한 사람들도 제법 됐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예능에선 보기 힘든 이 비극적 결말에 대한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대의 아픔을 <무한도전> 식으로 풀었다’, ‘원치 않게 문화방송을 떠난 동료들에게 바치는 김태호 피디의 위로다’, ‘<무한도전>은 원래 아픔이나 슬픔을 정면 돌파하는 쇼였다’ 등등. 그런데 남들이 결말을 해석하느라 바쁜 동안, 난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무한도전>에서 정준하를 빼버리면 좋겠다고 투덜거리던 게 불과 수년 전 일이란 것을 떠올린 것이다.

<무한도전> 리뷰로 이 일을 시작하다 보니 자연스레 관련 질문을 많이 받곤 한다. 그리고 초반 몇 년간은 이런 질문을 굉장히 자주 들었다. “정형돈하고 정준하는 대체 어떻게 <무한도전>에 계속 붙어 있는 걸까요?” 정형돈에 대한 애정이 깊던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이들도 샌드백이 되어 다른 멤버들의 공격을 받아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언젠가 잠재력을 보여줄 것”이라는 요지의 답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정준하에 대해서만큼은, 나 또한 내심 ‘저이가 어쩌면 저렇게 오래 붙어 있지?’ 싶었다. 조금 수위 있는 농담이라도 던지면 미간에 주름을 잡고 화를 내지, 받기 어려운 멘트를 던져놓고선 상대가 안 받아줘 서운하다며 징징거리지, 한주도 안 거르고 쇼의 맥을 뚝뚝 끊는 것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소심하고 잘 삐치는 성격의 그는 방어적인 태도로 자기 변호에 나서곤 했는데, 이런 식의 대응은 오히려 일을 키웠다.

사실 정준하가 쇼에 적응하기 어려워한 이유는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순발력이 좋은 코미디언이라기보단, 대본을 충실히 소화하는 배우에 가깝다. 데뷔작 문화방송 <테마극장>, 출세작 문화방송 <코미디 하우스> ‘노브레인 서바이버’, 정극에 도전한 <에스비에스>(SBS) <장길산>, 주말 예능 에스비에스 <일요일이 좋다> ‘반전 드라마’. 그의 활약상을 돌아보면, 모두 충실한 대본 연기를 요하는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방면으로 특화된 정준하로선, 즉석에서 서로 치고받으며 순발력 있게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무한도전>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고 그 결과마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본 없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상황, 실제 멤버들 간의 관계를 쇼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며 흐려진 ‘리얼’과 ‘쇼’의 경계, 거기에 정준하의 소심한 성정이 합쳐지자 결과는 재앙이 되었다. 정준하는 거의 모든 상황극을 실제 상황처럼 정색하고 받아버렸다. 그가 화가 날 때마다 잡히는 미간의 주름은 <무한도전>을 편한 마음으로 보기 어려운 쇼로 만들었다.

상황은 2010년이 되어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반년 넘게 준비한 프로레슬링 특집 ‘더블유엠세븐’(WM7)이 계기였다. 체력과 운동신경이 좋아야 하고, 사고를 피하기 위해 약속한 합에 충실해야 하는 프로레슬링은 여러모로 정준하에겐 안성맞춤인 종목이었다. 특히나 정준하가 관객의 야유와 상대의 공격을 다 받아낸 끝에, 결국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설계된 1라운드의 플롯은 <무한도전> 속 정준하의 처지와 묘하게 겹쳤다. 자신의 몫이 남들의 공격을 잘 받아주는 샌드백 역할이라는 것과, 그것만 제대로 해도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단 사실을 온몸으로 각성한 것이다.

물론 연애와 결혼을 거치며 심리적인 안정을 찾은 것도 큰 몫을 했다. 심적으로 안정되니 전보다 대범하게 상대를 대하게 되었고, 프로레슬링으로 제 역할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으며, 혼자가 아니기에 언행을 살피게 되었다. 정준하는 그렇게 하나둘 흠을 메우더니, 2011년 연말쯤엔 상대의 공격을 무던하게 받아낸 뒤 애드리브까지 얹어 되받아치는 단계에 올랐다. <무한도전> 원년부터 쇼를 본 이들에겐 감개가 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한상사’ 속 정준하 과장을 보며, 난 <무한도전> 초창기의 정준하를 떠올렸다. 무능의 상징, 지각을 밥 먹듯이 하며, 눈치 없이 식탐만 많아 동료는 물론 부하 직원들에게까지 원성을 듣는 존재. 하지만 정준하 과장이 잘리는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울었다. 원치 않는 방식으로 조직을 떠나야 하는 상황의 무게를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똑같이 무능했던 <무한도전>의 정준하에겐 사람들은 왜 그리도 냉정했던 걸까?

물론 ‘무한상사’ 속 정준하 과장의 실직과, 연예인 정준하의 하차는 느낌이 다소 다를 것이다. 정준하는 연예인이니까. 이거 아니어도 할 일 많잖아. 돈 잘 버니까. 그러니까 <무한도전> 정도는 좀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연예인의 하차가 직장인의 실직보다 덜 충격적일 이유도 없다. 일반인의 실직과는 달리 연예인의 하차는 전 국민이 다 아는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나. 얼굴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밀려나는 충격의 크기란, 어디를 가든 ‘요샌 왜 안 나오시냐’는 질문을 마주해야 하는 삶이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기를 쓰고 부업을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선택해 주는 이가 없으면 그냥 얼굴만 널리 알려진 무직자가 되는 셈이니까. 이 직업엔 실업수당도 없고 퇴직금도 없고, 기술이라도 있어서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만약 정준하가 그때 원치 않는 방식으로 <무한도전>을 떠나게 됐다면, 그 또한 찬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는 거리에 나와 문화방송 사옥을 올려다보지 않았을까? 정준하 과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란 건 참 쉬워서, 대기업의 정리해고를 보며 나는 기세 좋게 떠들고 다녔다. “조직의 효율이 떨어졌으면 운영 방식을 재고하거나, 인재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 효율을 높여야 한다. 사람을 자르는 것으로 효율을 담보하는 것은 경영의 실책까지 노동자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떠들어 놓고선, 나 또한 무의식중에 <무한도전>이라는 쇼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서라면 정준하가 빠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저 사람 때문에 제대로 쇼가 굴러가질 않잖아.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멤버 한두명 바뀌는 건 병가지상사니, <무한도전> 제작진이 정준하를 하차시켰다 해도 시청자들의 항의가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그런 정준하를 믿고 기다려 주었고, 그가 잘할 수 있는 미션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왔으며, 그의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내가 입만 살아 쉽게 떠들고 다니던 ‘효율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명제를, 누군가는 진짜로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한상사’ 정준하 과장의 어깨 처진 뒷모습을 보며 새삼 생각했다. 사람의 오늘만을 보고 그에 대해, 그의 잠재력에 대해 단언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무한도전> 제작진이 정준하를 믿고 그에게 기회를 줬던 것처럼, ‘무한상사’도 정준하 과장을 조금 더 믿어줬다면 어땠을까. 부디 이번 토요일에 방영될 ‘뮤지컬 무한상사’ 2부에선, 정준하 과장이 불행의 터널을 벗어나 다시 웃을 수 있길 바란다. <무한도전>의 정준하가 그랬던 것처럼.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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