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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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처음엔 존재감 없는 살림꾼‘인간의 조건’ 방송 거듭되며
모든 독거인의 ‘엄마’로
외모 탓 강한 역만 맡은 그
무대 뒤 사근사근한 모습에
시청자들 ‘반전 매력’ “입구는 있는데 출구는 없네요.” 최근 만난 한 친구는 내게 추천받은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로그램에 빠져드는 건(입구) 쉬운데, 도저히 빠져나올 수(출구) 없더란 것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 고백을 털어놓은 사람이 이 친구 하나는 아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고단한 서울살이 중인 후배들은 갑자기 “이거 보니까 엄마 보고 싶어”진다고 했고, 결혼 적령기에 도달한 독거인들은 “별생각 없다가 토요일 밤에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울컥하고 결혼하고 싶어진다”고도 했다. 이게 다, 정태호(사진) 때문이다. 사실 정태호는 <한국방송>(KBS) <인간의 조건>에서 처음부터 눈에 확 띄는 멤버가 아니었다. 처음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잡았던 것은 양상국이었다. 휴대전화, 인터넷, 티브이 없이 일주일을 사는 게 체험 과제였던 파일럿 방송, 공교롭게 그 주 내내 다른 스케줄이 없었던 양상국은 자연스레 가장 많은 출연 분량을 확보했다. 바쁜 멤버들 대신 직접 집전화를 개통하는가 하면, 고향의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이산가족 상봉 수준의 리액션을 보여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끙끙거리며 프라모델을 조립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전부 입을 모아 말했다. “양상국 귀엽지. 나도 좋아해.” 모든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그렇듯, 쇼가 진행되면서 포커스도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회용 카메라로 추억을 남기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여린 감성의 김준현, 오랜 시간 쌓인 오해로 서먹서먹하던 맏형 박성호와 김준호, 허세남 이미지를 밀지만 의외로 소심한 허경환까지. 양상국에게서 시작한 포커스가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이상하게도 정태호에게는 초대형 ‘브라우니’ 인형을 숙소로 가져온 것 외엔 큰 에피소드가 없었다. 늘 뒤에서 요리를 하고 있거나,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아무튼 뭔가 계속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렇게 파일럿 방송이 끝났다. ‘쓰레기 없이 살기’ 체험 과제가 시작되자, 점점 정태호가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서 냉동실에 넣어 얼려둘 때나, 빈 음료수 병을 색칠해 공예품을 만들 때만 하더라도 ‘살림하는 사람들이면 저 정도는 다들 하지’ 싶었다. 그런데 빈 골판지 상자를 잘라 에펠탑 모양의 전등을 만드는 걸 보면서 뭔가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아, 저 남자 보통 살림꾼이 아니구나. 손재주도 좋은데다 아기자기한 구석도 많구나. 주변에 살림하는 사람들로부터 “보다 보니 정태호가 다시 보인다”는 말이 들려왔다. 쇼가 진행될수록 점점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인간의 조건>의 정태호는 <개그콘서트> 무대 위에서 보던 정태호와는 묘하게 다른데,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차 없이 살기’ 편, 비 내리는 부암동의 살인적인 내리막길을 기어이 이륜기구 ‘세그웨이’를 끌고 내려가겠다는 김준호를 옆에서 거들며, 정태호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형! 지금 힘 안 줬지! 어쩐지 너무 무겁더라니! 힘줘!” 결국은 내리막길이 끝날 때까지 낑낑거리며 세그웨이를 함께 옮겨줄 거면서, 잔소리는 절대 멈추지 않는 정태호의 모습은 분명 낯익었다. ‘돈 없이 살기’ 편에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탈탈 털어 식재료를 구해다 멤버들 먹일 카레를 끓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 내가 그의 모습을 어디서 보았는지는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산지 음식만 먹고 살기’ 편에서 닭볶음탕, 닭백숙, 매운탕, 된장찌개를 척척 끓여내는 것도 모자라, ‘떡을 만들어 고마운 이들에게 선물하라’는 소(小) 미션에서 남들이 다 방앗간을 가는 동안 혼자 도깨비방망이 믹서로 직접 쌀을 빻아 떡을 쪄내는 광경을 보고 확신했다. “맞아. 저거 엄마가 저렇게 하는 거 봤어!” 번거로운 일을 벌여 놓으면 잔소리를 하면서도 팔을 걷어붙여 돕고, 떡 정도야 간단하게 집에서 쪄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살림의 달인, 우리네 엄마들의 모습을 정태호에게서 본 것이다. ‘산지 음식만 먹고 살기’ 마지막 편,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태호에게 전화를 건 김준호는 정태호를 ‘여봉’이라고 불렀다. 그 순간 집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 수많은 독거인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래. 카레도 만들어 놓고 백숙도 끓여주고 닭볶음탕도 만들어 놓고 전화기에 대고 “빨리 와”라고 말해주는 정태호 같은 동거인이 있으면 어떨까. 이 생각을 한 게 반드시 여성 시청자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정태호는 내 주변 모든 독거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인간의 조건>을 출구 없는 쇼로 만들었다. 둘러보면 가정적인 남자들은 의외로 많다. 그럼에도 정태호의 이런 모습이 의외의 매력으로 다가왔던 건 아마 그가 <개그콘서트> 무대에서 보여줬던 캐릭터들이 다 하나같이 선 굵고 센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리라. 공채 이후 정식 데뷔작이었던 <개그콘서트> ‘너무 좋아’(2008년 작)에서, 정태호는 가진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느끼한 작업 멘트 하나로 여자를 홀리는 작업의 선수 ‘태복’으로 첫인상을 남겼다. 여자친구 생일도 “부처님 생일, 예수님 생일, 그리고 경아씨 생일은 공휴일이니까”라는 멘트 하나로 이벤트를 때우는 느끼한 복고남. 시효가 지난 복고풍 느끼함이 웃음의 포인트였던 ‘너무 좋아’부터 정태호의 이미지는 많이 셌다. 아마 카랑카랑한 발성과 진한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큰 코, 짙은 눈썹, 진취적으로 돌출된 광대뼈, 두터운 입술, 튼실한 하관까지. 오죽하면 가수 나훈아와 닮은 인상이라는 걸 내세워 ‘봉숭아 학당’에 등장했을까. 덕분에 정태호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캐릭터들을 맡곤 했다. 이상민이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반복해서 벽돌을 격파하거나 콜라를 원샷하는 등의 가학적인 도전을 반복해야 하는 시간여행의 희생양(‘시간여행’), 몸에 딱 붙는 발레복에 난감해하는 학생들을 엄격하게 가르치는 품격 높은 발레 선생(‘발레리노’), 가장 위험한 풍자를 도맡아 하는 레게머리 남자(‘용감한 녀석들’), 부를 과시하며 종업원에게 진상을 피우는 귀부인(‘정여사’)에 이르기까지. 코미디언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을 제외하면, 이제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정극 배우와 그가 맡은 역할을 혼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코미디언들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작품이 끝나면 맡았던 배역을 내려놓아도 되는 배우들과 달리, 대중의 뇌리에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한 가지 이미지로 승부를 봐야 하는 코미디언들은 캐릭터를 쉽게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착시는 여기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박명수가 애아버지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아이를 능숙하게 돌보는 <무한도전> ‘간다 간다 뿅 간다’ 특집을 보고 새삼 놀라고, 유들유들한 바람둥이 이미지의 이휘재가 사실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서 가족들과 통화할 때는 한없이 무뚝뚝해지는 걸 보며 의외라 생각한다. 정태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조건>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청자들로선 무대를 내려온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이리도 가정적이고 사근사근한 사람인 줄 누가 알았으랴. 하지만 코미디언 여섯 명이 무대 위의 가면을 벗고 유사가족 공동체를 일구고 사는 리얼 버라이어티 <인간의 조건>에서 자연인 정태호의 모습은 빛을 발한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오면 멤버들을 위해 요리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꿈의 동거인, 부산까지 내려갈 기름값은 있는데 올라올 기름값이 없어 당황해하는 허경환에게 “걱정하지 마! 형들이 어떻게든 너 기름값 보내줄게!”라고 든든하게 용기를 주는 이상적인 가족.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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