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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07 19:29 수정 : 2015.10.23 14:46

시트콤과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고민해온 가수 이적. 가을 무렵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다. 2010년 9월 발표한 4집 앨범 <사랑> 당시 사진. 뮤직팜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2010년 새앨범 들고 ‘놀러와’ 출연
절친 동료들 덕에 농담 섞어가며
작곡의 괴로움에 대해 털어놨고
1년뒤 ‘무한도전 가요제’ 게스트로
노래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줘

TV 빼곤 음악홍보 어려운 상황서
이미지 망가질 부담 훌훌 털어
가수가 음악 얘기할 프로 많아지길

“알리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 안 할 수 없다.” 2010년 한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서, 가수 이적은 가면 갈수록 티브이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음악을 알리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음반 시장은 예전의 영화를 잃은 채 붕괴됐고, 라디오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으며, 그렇기에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삽입곡이 아니고선 대중의 낙점을 받기는커녕 노래의 존재를 알리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그렇다고 섣불리 아무 프로그램이나 출연했다가는 가수가 기존에 고수해 온 이미지를 잃을 수도 있다. 이 가혹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1995년 ‘패닉’으로 데뷔한 이래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명으로 인정받은 이적 또한 그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선배 유희열처럼 라디오에서 해오던 과격한 농담을 티브이로 연장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건 <한국방송>(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는 든든한 음악 전문 프로그램을 홈그라운드로 가지고 있을 때나 시도해 볼 수 있는 모험이다. 그렇다고 윤종신처럼 본격적으로 예능과 음악의 두마리 토끼를 쫓는 것도 덜컥 결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리라. 윤종신 이후 예능에 진출한 수많은 가수들 중 윤종신만큼 안정적으로 두가지 일을 해내는 가수가 별로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3년이 지난 지금, 이적은 케이블 음악채널 <엠넷>(Mnet)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송의 적>에 출연중이다. 후배가수 존 박과 함께 가상의 음악 토크쇼 <이적 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의 이 ‘쇼’는 이적이 기존에 고수해왔던 이미지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짓궂은 농담을 건넨다. ‘진정한 아티스트들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환경에 대한 저항’을 강조하며 짐짓 고독한 예술가로서의 자세를 취해 보이던 이적은, 다음 장면에서는 ‘싱어송라이터 지망생’이라는 제자 ‘응구’의 섹시댄스를 보며 박수를 친다. 이 아찔한 낙폭 앞에서 시청자들은 실소한다.

이미 유브이(UV)와 함께 <유브이 신드롬>을, 룰라의 이상민과 함께 <음악의 신>을 만들면서 음악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완성한 박준수 피디(PD)는 이적을 지적 허세로 가득한 속물로 그려내고, 이적과 존 박은 서툰 연기로나마 자신의 경력과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조롱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자칫 “망가졌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했던 2010년의 이적과, “책은 다섯권 정도를 동시에 읽는 게 눈에 더 잘 들어온다”며 허세를 부리는 2013년 <방송의 적>의 이적, 도대체 그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그 3년 사이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이 한국 대중음악을 주 소재로 끌어안았다. <문화방송>(MBC)의 <우리들의 일밤> ‘나는 가수다’가 등장했고, 그 뒤를 한국방송의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따랐다. 수많은 가수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무게 잡지 않는 소탈한 모습을 보여줬고, 그렇게 대중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났던 가수들이나 아직 눈도장을 찍지 못한 신인들이 주말 황금 시간대 예능을 수놓았다. 예능에 출연하려면 가수로서 쌓아온 이미지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불신은 그렇게 어느 정도 불식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이적의 극적인 변화는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나는 가수다’나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 출연하는 가수들은 모두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남이 예전에 불렀던 히트곡을 다시 불렀다. 두 프로그램 모두 한국 가요계가 황금기를 누렸던 과거의 영화에 기댄 프로그램이라는 한계가 명확했다. 대중음악 자체가 주 소재가 된 프로그램들일수록, 신곡을 발표하거나 홍보하기엔 어렵다는 역설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적은 운이 좋았던 편이다. 2010년 이후 그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의 가창력이나 히트곡들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적이라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었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이적은 새 앨범을 홍보하러 문화방송 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했다. 신정수 피디와 김명정 작가 콤비가 매주 다른 주제를 선정해 그에 맞는 연예인들을 초대하는 ‘기획 섭외’로 토크쇼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을 받던 시절이었다. 이적 역시 혼자가 아니라 절친한 음악 동료들과 함께 쇼에 초대받았고, 덕분에 친구들끼리 사석에서나 가능할 법한 내밀한 이야기들도 손쉽게 꺼낼 수 있었다. 이야기는 먼 길을 떠나 서로의 신변잡기 농담을 훑다가도 금세 음악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이적은 기억을 더듬어 어린 시절 처음 작곡했던 노래를 들려주었고, 히트곡 ‘다행이다’를 어떻게 작곡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을 말했으며, ‘자뻑과 자학 사이를 오가야 하는’ 작곡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게스트가 자신의 직업관과 작업 방식에 대해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황금 시간대 토크쇼에서 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그 시절의 <놀러와>는 그 드문 일이 가능한 쇼였다. ‘세시봉’ 멤버들이나 뮤지컬배우들, 성우들처럼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게스트들을 초대해, 그들의 직업관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면서 재미까지 챙길 수 있는 종류의 쇼는 <놀러와>가 전무후무했다. 이적과 함께 나온 정재형, 장기하, 루시드 폴, 장윤주는 물론, 당시 보조 엠시로 활약했던 길과 이하늘까지 모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 다음해, 같은 방송사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은 격년으로 꾸려왔던 ‘무한도전 가요제’를 준비하며 게스트 뮤지션으로 이적을 초대했다. 유재석과 함께 팀을 이뤄 출전곡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이적은 유재석에게 노래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를 먼저 물었다. 유재석이 압구정 클럽에 드나들던 추억은 복고풍의 댄스 트랙 ‘압구정 날라리’가 되어 무대 위에 올려졌고, 같은 시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20대의 기억은 보너스 트랙 ‘말하는 대로’가 되었다. 이적은 <무한도전>을 통해 노래는 부르는 사람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시청자들은 노래가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지를 함께 지켜볼 수 있었다. <놀러와>가 작업의 고통과 환희에 대한 이적의 설명을 들려줬다면, <무한도전>은 작업 과정의 요체를 직접 시청자들의 눈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예능에 나와서 이미지가 망가질 것을 걱정한 지 만 1년도 안 되어, 이적은 단순히 웃고 떠드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음악가로서의 자신을 선보일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두개나 만났다. 과거의 히트곡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작업을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작업이 끝난 결과물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식으로 음악에 임하는지의 과정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뮤지션은 그리 많지 않다. 덕분에 이적은 이제 자신을 소재로 짓궂은 농담을 일삼는 <방송의 적>에 출연해 뻔뻔스레 자신의 캐리커처를 연기하며 자신을 홍보할 수 있다. 이미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는지 확고하게 해두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글을 이렇게 끝내도 좋을까? 사실 <방송의 적>에서 이적이 허세를 섞어 말한 ‘진정한 아티스트들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시대’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음원 시장은 한정된 티브이 플랫폼에 의존해 지탱하는 중이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처럼 오롯이 무대에만 집중하는 프로그램은 점점 자리를 잃고 있다. <놀러와>나 뮤지션들이 무리지어 출연했던 <무한도전> 가요제 특집 같은 기회는 흔치 않고, 주말 예능은 가수들에게 여전히 남의 노래로 경연을 펼치기를 요구한다. 가수가 자기 음악 이야기를 할 공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농담인 줄 알면서도, 극중 이적이 만들려 하는 가상의 음악 토크쇼 <이적 쇼>가 진짜로 신설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010년 데뷔 15년차 이적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수많은 가수들이 대중과의 접점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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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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