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에서 평범하지만 선한 형사 변방진을 연기중인 배우 박원상.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 김근태 의원을 연기했다. 손홍주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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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소탈한 열연’으로 극찬받은 배우그 연기는 ‘남영동 1985’서 정점…
배역을 살아내며 더욱 깊어졌다 드라마 ‘상어’서도 평범한 연기로
보는 이들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과장 없는 감초 묘사에 성공
그는 연기의 신대륙을 찾았다 가끔 그런 배우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주연 배우 옆에서 조용히 제 몫을 하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시선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조연 배우 말이다. 내겐 요새 <한국방송>(KBS) 월화드라마 <상어>의 박원상이 그렇다. 흔히들 말하는 ‘신 스틸러’의 개념과는 또 다르다. 박원상은 주연들 사이에서 독특하고 별난 인물을 연기해 시선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독특하고 별난 주연들 틈에서 유일하게 현실에 발을 디딘 인물을 연기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상어>의 주요 등장인물은 다들 어딘가 한쪽으로 치우친 인물이다. 주인공 한이수(김남길)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뒤로는 인생의 목표가 복수와 조해우(손예진)로 간결하게 정리된 인물이다. 조해우는 한이수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과 그와의 재회가 생의 유이한 목표이고, 해우의 아버지 조의선(김규철)과 할아버지 조상국(이정길)은 제 허물을 들키지 않은 채 부와 명예를 유지하며 사는 게 목표다. 각각 복수, 진실, 자기 안위로 요약할 수 있는 등장인물의 욕망은 극단적일 만큼 평면적이다. 모티프로 차용해 온 신화 속의 오르페우스가 오로지 아내를 구해내겠다는 열망 하나로 지옥까지 내려가듯, <상어>의 인물들도 당면한 목표만을 보고 질주한다. 그리고 이 극단적인 인물들 사이에, 해우를 도와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 변방진(박원상)이 있다. 그는 정의감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형사가 아니라, 감정에 흔들리는 일 없이 조용하고 집요하게 제 몫의 일을 하는 노련한 형사다. 수사를 방해하는 상부의 압력을 관료주의적인 대응으로 피해가는 수완도 갖췄고, 단서를 쫓을 때는 자기 패를 숨기고 허허실실 실속을 챙기며, 가족들 앞에선 한없이 소탈하고 자상한 아버지가 되는 변방진은 <상어>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박원상은 낮고 차분한 톤의 목소리와 절제된 대사 처리, 일상의 피로를 담은 표정으로 변방진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낸다. 주변을 가득 메운 강렬한 인물들을 제치고, 가장 평범한 인물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역설이 일어난 셈이다. 극의 중심 서사에 공감하지 못해 덜컹거리다가도, 화면에 변방진만 등장하면 놀랍도록 안심이 되는 이 신기한 현상이라니. 내가 알고 있던 박원상이 맞아? 평범해서 더 비범한, 이란 표현이 가능할까. 돌이켜 보면 지금껏 박원상이 연기해 온 인물들 중 적잖은 수가 평범함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다. <범죄의 재구성> 속 비열한 사기꾼 제비나, <화려한 휴가>의 단발머리 건달 용대처럼 과장된 움직임과 센 대사로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역도 있었지만, 아픈 아들 앞에서 슬픔을 애써 숨기는 아빠로 나온 <안녕, 형아>나, 바람둥이 오르간주자 정석으로 분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평범한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해야 하는 작품도 있었다. 박원상의 상업적 성공이 전자의 감초 조역에 기반한 것이었다면, 그가 이룬 예술적 성취는 후자의 일상 연기에 방점이 찍힌다. 작년 말, 한 예술전용극장 체인이 박원상을 ‘이달의 배우’로 선정하며 고른 수식어는 이런 그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소탈한 열연의 배우.” 이런 독특한 지위가 가능한 비결로는 물론 특유의 서민적인 연기 톤도 있겠지만, 그의 얼굴 또한 큰 몫을 차지한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의 얼굴 안에는 좌우로 처져 유순해 보이는 눈과, 강하고 다부진 광대와 하관, 살짝 비틀린 입이 공존한다. 활짝 웃어 보이는 것만으로도 선해 보일 수도, 입을 더 비트는 것만으로도 비열해 보일 수도 있고, 시선을 멀찍이 두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피로를 얼굴에 담아낼 수 있다. 선량함과 비열함을 평범한 얼굴 안에 함께 가지고 있는 덕분에, 박원상은 미묘한 감정의 결을 섬세하고 선명하게 표현해 낼 수 있다. 바스트샷(인물의 머리에서 가슴까지를 화면에 담는 촬영구도)이나 클로즈업에서, 그의 표정은 놀랄 만한 위력을 지닌다. 박원상의 이런 장점이 극에 달한 것은 작년 말 발표된 영화 <남영동 1985>에서였다. 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수기 <남영동>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남영동으로 끌려간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박원상)가 고문기술자 이두한(이경영)의 고문 끝에 자아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고 허위 자백을 하고 마는 야만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이유도 모르고 끌려온 당혹감, 거짓 자백을 강요당할 때의 모멸감, 옷이 벗겨지고 칠성판에 묶여 고문을 당하는 순간의 공포와 고통, 자술서를 써내려 갈 때의 철저한 고독까지, 박원상의 얼굴은 다양한 앵글에서 클로즈업되어 주인공 김종태의 고난을 증언한다. <남영동 1985>는 김종태를 강철 같은 신념의 민주화운동가로만 그리진 않는다. 김종태는 가족과 함께 목욕탕에 다녀오던 순간을 되새기고, 바닷가로 가족 여행을 떠나는 환영을 반복해서 목격한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민주화운동가 김종태와, 일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인간 김종태가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다. 이 극적 대비는 평범한 인물의 일상을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박원상의 얼굴에 힘입어 더욱 선명해졌고, 덕분에 관객들은 <남영동 1985>를 보면서 단순히 김근태 상임고문이 겪은 과거를 복기하는 게 아니라, 살아 숨쉬는 김종태라는 인물이 겪는 현재를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연기들엔 어떠한 과장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김근태 상임고문이 겪었을 고통과 모멸을 고스란히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제작진은 전기고문을 제외한 모든 고문을 실제에 준하는 강도로 재현했다. 물 공포증이 있었다는 박원상은 실제로 물고문을 당했고, 촬영 중간중간 대화를 나누는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배역을 이해하기 위해 배역과 같은 심리적, 육체적 상태를 유지하는 ‘메소드 연기’의 끝이 있다면 아마 여기였으리라. 배우 스스로가 “김종태가 비명을 지르는 건지, 배우 박원상이 비명을 지르는 건지 구분이 어려운 상태”까지 다녀왔다고 증언했으니, 박원상은 <남영동 1985>를 통해 연기와 실제가 둘이 아닌 지점, 배역을 오롯이 살아내는 경지를 보고 온 셈이다. 이런 체험을 하고 난 뒤의 연기가 그 이전의 연기와 같을 수는 없다. <남영동 1985> 이후, 박원상의 연기는 한 단계 더 깊어졌다. <남영동 1985> 직후에 찍은 <7번 방의 기적>에서 박원상은 사기 전과 7범의 최춘호를 연기했다. 주연 류승룡을 중심으로 여러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루는 코미디 영화인 <7번 방의 기적>에서, 기능적인 감초 조역인 박원상의 연기 톤은 그 전과는 달랐다. 예전이라면 좀더 힘주어 강조해 표현했을 대사나 행동들을, 박원상은 좀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표현해낸다. 물론 영화마다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다르니 등가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앙상블 연기를 필요로 했던 <범죄의 재구성>이나 <화려한 휴가>에 비해 훨씬 더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결과물임은 분명했다. 과거 감초 인물과 일상을 사는 인물을 묘사하는 문법이 각기 달랐다면, 이젠 하나의 문법으로 과장이나 꾸밈 없이도 자연스럽게 감초 인물을 묘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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