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릴러물인 수목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겉으로는 까칠한 듯 보여도 속은 여린 국선전담변호사 장혜성 역을 맡은 이보영. <너의 목소리가 들려> 누리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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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 있어요?”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밥을 먹던 중 누군가 묻기에, 별생각 없이 답했다. “수목에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재미있더라고.” 티브이 보는 걸 업으로 삼는 선배에게 예의상 던진 질문이었겠으나, 탐스러운 떡밥이 던져지자 후배들은 너도나도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여자 후배들은 이종석과 윤상현에 대한 예찬을, 어떤 후배는 정웅인의 악역 연기가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에 대한 감탄을, 또 누군가는 미국 드라마 <앨리 맥빌>이나 일본 게임 <역전재판>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며 자기 상식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원, 말을 시켜놓고선 자기들끼리 신났구먼.
가만히 앉아 듣다 보니, 주연배우 네 사람 중 유독 이보영만큼은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이보영에 대해선 관심 없어?” 한 후배가 답했다. “그런 건 아닌데, 보고 있으면 좀 괴롭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캐릭터가 좀 많이 미숙하잖아요. 명색이 변호사인데 변호는 잘 못하지, 자기가 잘못한 거 있으면 괜히 남들한테 화내지, 실수 연발에 변호사로서의 책무감도 제로고. 어쩐지 처음에 회사 들어갔을 때가 떠올라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고요.” 후배의 말에 내심 무릎을 쳤다. 아, 내가 장혜성, 곧 이보영을 볼 때 불편했던 게 거기에 있었구나.
<에스비에스>(SBS) 수목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 장혜성은 보통의 변호사 캐릭터와는 조금 다르다. “월 300~400(만원)은 보장되니까” 국선변호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장혜성은 정의감이나 사명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법정에 선다. 그런 주제에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변론이 20초 안에 뻔하고 성의 없게 끝난다고 ‘20초’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는가 하면, 의뢰인의 말을 믿는 대신 “그냥 곱게 혐의 인정하고 선처 부탁해서 적당히 형량 줄이자”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콤플렉스 덩어리에 자존심만 세서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괴짜 변호사, 드라마의 주인공치곤 참 밉상이다.
이 정도 밉상이면 정을 주기 어려워야 맞는데, 희한하게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남들 앞에서는 자존심 세운답시고 목에 힘주고, 성격도 모나서 가는 곳마다 좌충우돌 부딪히기만 하다가도, 혼자 있는 순간이면 자신의 무능함에 절망하며 자신이 변호사를 할 수 있는 그릇인지 자문하는 그의 모습이 영 낯설지가 않아서다.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멋도 모르고 글 쓰는 사람이랍시고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칼날같이 세우던 시절의 내 모습이 딱 저랬겠지. 세상에 다칠까봐 내가 먼저 발톱을 잔뜩 세운 채,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선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후배들이 이보영이나 그가 맡은 캐릭터를 좀체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생각하면 불쑥 치밀어 오르는 민망함에 도리질을 치게 만드는, 모든 게 서툴고 미숙하던 자신의 잊고 싶던 지난날을 상기시키는 캐릭터니까 말이다. 그의 좌절에 공감하고, 그의 미숙함을 과거의 자기 모습에 투사해서 응원할 수는 있어도, 동경이나 환상의 대상은 될 수 없는 캐릭터 아닌가. 이종석과 윤상현이 얼마나 멋진지 ‘찬탄’하고, 정웅인의 악역이 얼마나 대단한지 ‘감탄’하는 거에 비하면, “나도 예전에 저런 삽질 했어”라는 ‘공감’의 고백은 좀 김빠지니까 말이다.
이보영이 연기했던 캐릭터를 보며 나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하반기 화제작이었던 <한국방송>(KBS) 드라마 <내 딸 서영이>(2012)에서, 이보영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준 아버지 삼재(천호진)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주인공 이서영을 연기했다. 아버지에게 모진 소리를 내뱉고 남들 앞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상처투성이 인물을 보며, 나는 한때나마 부모님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던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키 작은 중도비만의 남자인 내가, 훤칠하고 아름다운 여배우 이보영의 연기를 보며 번번이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하는 이 기묘한 상황이라니.
‘너목들’의 비뚤어진 변호사 장혜성세상에 날세운 모습이 딱 우리같다
‘결핍’ 연기할 때 더 빛나는 이보영
뒤틀리고 아픈 감정 함께 나누는
연기자로 오래 남아주길 바란다 세상에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배우들이 있고, 공감과 동일시의 대상이 되는 배우들이 있다. 전자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과 아우라로 사람들을 홀리고 유혹하는 동안, 후자는 평범한 이들이 가진 결함, 그들의 욕망, 그리고 삶의 무게와 고통을 모사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보영은 전자의 배우들이 지닌 외형적 조건을 갖춘 채 후자의 노선을 걷는다. 많은 이들이 이보영의 대표작으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 현주를 연기한 <비열한 거리>(2006)를 말하고, 본인도 자신은 주로 정적인 역을 맡아서 연기해왔다고 말하지만, 조금만 신경써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보영은 유독 뭔가 결핍된 인물을 연기할 때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배우다. 적잖은 여자 배우들이 작품 속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연기하며 주체가 아닌 객체로 자신의 경력을 채우는 동안, 이보영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당당한 주체를 연기하곤 했다. 그는 직접 ‘서동요’를 전파해 사랑을 쟁취하는 <에스비에스> 드라마 <서동요>(2005)의 선화 공주였고, 조선의 독립 따윈 관심 없고 자신은 한탕 크게 챙겨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원스 어폰 어 타임>(2007)의 도둑 춘자였다. 순진한 청년을 꼬드겨 그의 유산을 강탈해 신세를 고치고자 하는 <티브이엔>(tvN)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2010)의 룸살롱 텐프로 서린이었다. 슬픈 연기를 할 때조차 이보영은 아름다운 꽃처럼 시련을 맞이하는 청초한 여주인공이 아니라 고난 앞에서 처절하게 망가지는 인물을 그려낸다. 온몸을 활용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통곡하는 이보영의 연기를 보는 것은 단순한 시청이나 관람의 차원을 넘은 대리체험에 가깝다. 아버지의 존재를 숨기고 거짓에 기반한 결혼생활을 하며 괴로워하는 <내 딸 서영이>의 서영의 불안이나, 어머니의 유언 앞에서 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혜성의 통곡, 말기 암 환자인 아버지를 간병하고 빚에 쪼들리는 현실에 치인 나머지 과대망상증 환자의 판타지에 동참해 위안을 얻는 <나는 행복합니다>(2008)의 정신병동 간호사 수경의 파리한 얼굴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비슷한 종류의 고난을 경험했던 이들에게, 이보영은 감정이입과 공감의 대상이 된다. 흔히 “한국엔 여자 배우들이 맡아서 연기할 만한 좋은 배역이 드물다”고들 한다. 한 해에도 수많은 이들이 큰 꿈을 품고 데뷔하지만, 화면 속 정물처럼 존재하는 여주인공이나 감초 조역이 아니라 주체적인 역할로 살아남는 데 성공하는 이들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2003년 데뷔 이래 10년 동안, 이보영은 <내 딸 서영이> 정도를 제외하면 메가 히트작이나 엄청난 스타덤 없이 꾸준하고 착실하게 그 시간을 채웠다. 유달리 여자 배우들에게 배역이 인색한 한국 엔터테인먼트계에서 그가 이렇게 오랜 시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적이고 단아한 이미지’라는 외형적인 조건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들을 맡아 연기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시청자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대상, 동일시의 대상이 되는 배우는 오래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이젠 확고하게 그의 대표작이 된 드라마 <내 딸 서영이>가 끝난 뒤, 이보영은 한 인터뷰에서 “서영이를 연기하다 보니 만들어진 캐릭터보다는 만들어가는 캐릭터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화면 너머 평범한 시청자들의 희로애락과 조우해온 이 비범한 배우라면, 스스로 만들어나갈 캐릭터들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닿을 수 없는 먼 곳에서 빛나는 스타가 아니라, 작품을 보는 우리네 못나고 뒤틀리고 아프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감정들을 함께 나누는 좋은 배우로 오래 남을 테니 말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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