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손현주가 연기하는 ‘최민재’는 재벌 2세에 철저한 악인이지만, 실패와 상실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면서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되고 있다. 에스비에스(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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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황금의 제국’ 최고의 악역 최민재역설적이게 가장 공감가는 인물이다
반복되는 도전과 패배 상실의 반복…
손현주는 실패를 설득력있게 연기
그만이 할 수 있는 성취를 보여준다 <에스비에스>(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은 마음 붙일 등장인물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다. 박경수 작가-조남국 감독 콤비의 전작 <추적자>에는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백홍석(손현주)과 그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명백한 약자이자 피해자였기에 마땅히 응원을 보낼 만했다. <황금의 제국>이 보여주는 세계는 다르다. 가진 것 없는 소시민이 권력에 대항해 싸우는 <추적자>와는 달리, <황금의 제국>은 그 소시민이 권력의 일부가 되기 위해 그들의 방식을 따라하고 결국 그들과 닮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고수가 연기하는 주인공 장태주는 지긋지긋한 가난의 구덩이에서 아버지를 잃은 뒤, 강해지기 위해 괴물이 되어간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는 일 없이 정정당당히 성공하겠다 다짐하지만, 프롤로그의 살인 장면이 보여주듯 그는 자기가 살겠다고 동료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는 ‘말종’으로 전락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도 그렇다. 창업주 최동성(박근형)·최동진(정한용) 형제간의 갈등이 그다음 세대로 대물림 되고, 후계 구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2세대들의 이합집산이 심화되는 성진그룹은 욕망과 협잡, 배신이 횡행하는 전쟁터다. 마음 붙일 인물을 찾기가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이 살풍경한 드라마 속에서, 그나마 가장 감정이입을 하기 쉬운 인물은 손현주가 연기하는 최민재다. 역설적이게도, 최민재는 극중 최고의 악역이자 모든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다. 그는 사촌 형제들과 차기 회장직을 놓고 치열하게 각을 세우며, 무리한 철거 강행으로 장태주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 모든 발버둥에도 그는 한번도 제대로 승리하지 못한다. 오히려 패배가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며, 최민재는 점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간다. 명석한 두뇌와 달리, 태생부터 (회장의 아들이 아닌) 부회장의 아들로 태어난 최민재는 방계라는 약점을 안고 사촌들과 싸운다. 그는 자신이 무시했던 장태주에게 속은 탓에 회사에서 축출되었고, 복귀를 위해 변변찮은 사촌 형에게 머리를 숙이는 굴욕을 참았고, 자금 위기를 막기 위해 아픈 전처를 버리고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그 바람에 전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해 혼자 울음을 안으로 삭여야 했다. 지금까지 6회가 방영되는 동안, 최민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잃고 자존심이 짓이겨지는 경험을 반복했다. ‘황금의 제국’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황폐해진다. 손현주는 이 도전과 패배, 상실의 반복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자신의 제안을 장태주가 거절할 때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미소, 전처의 납골묘를 바라보며 아득해지는 눈빛, 사촌들에게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 분노를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는 순간의 미세한 떨림과 같은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인물의 감정을 확실하게 전달해낸다. 자금난 때문에 병든 아내 윤희(이일화)에게 이별을 통고하며 감정을 추스르는 대목이나, 하필이면 재혼하는 날 윤희의 비보를 전해 듣고 괴로워하는 최민재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냉혈한인 줄만 알았던 그의 인간적 좌절과 상실에 공감하게 된다. 얄궂게도 그 순간 장태주가 찾아와 자금난을 타개할 동업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말할 때, 티브이 앞에 앉은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외치는 것이다. “왜 하필 이제! 진작에 수락했으면 아내를 버릴 필요도 없었잖아!” 동의는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는, 그래서 마음껏 미워하기 어려운 악인. 박경수 작가는 전작 <추적자>에서도 그런 인물을 극의 중심에 배치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처절하게 기어올라와, 처가 식구들이 주는 모멸을 참고 견딘 끝에 대선후보의 자리에 오르는 강동윤(김상중)이 그런 인물이었다. 마침 지난해 <추적자> 촬영이 한창일 무렵, 영화주간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손현주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추적자>를 끝낸 뒤에는 강동윤 같은 남자를 연기하고 싶다. 내가 강동윤을 했다면 어땠을까? 사람 괴롭히는 깡패 말고,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손현주의 최민재와 김상중의 강동윤은 미묘하게 다르다. 강동윤이 심중의 계산을 철저히 안에만 담아둔 채 이빨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매끈한 악인이었다면, 최민재는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전시하고 개싸움을 피하지 않는 처절한 악인이다. 생각해보면 손현주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내내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종종 끝내 지키지 못한 채 끝나는 인물을 연기한 경우가 많았다. <황금의 제국> 방영 직전에 개봉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에서, 손현주는 북한 5446 남파부대 총교관 김태원 대좌를 연기한다. 자신이 직접 훈련시켜 남파시킨 소년들을, 당의 지시라는 이유만으로 제 손으로 거둬야 하는 김태원 또한 극 내내 파멸의 길을 걷는다. 임무에 성공한다 해도 자신의 손으로 제자들을 파괴하는 내파를 경험할 것이고, 임무에 실패하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 외상을 입는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김태원은 패배한다. 얼굴을 뒤덮은 흉터와 투박한 이북 사투리, 냉정한 말투로 일관하는 김태원이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절제된 표현으로 그 상실감을 전달한 손현주의 공이다. 그가 영화보다 더 활발히 활동한 티브이 드라마로 넘어오면, 리스트는 더욱 길고 두툼해진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나 결국 아내를 잃고 마는 <한국방송>(KBS) <장밋빛 인생>의 반성문, 사채 빚에 시달리며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한국방송 드라마스페셜 <텍사스 안타>의 재훈, 선배를 잃은 죄책감 때문에 모든 살인사건을 연쇄살인으로 여기는 강박에 시달리는 드라마스페셜 <특별수사반 엠에스에스(MSS)>의 준성, 간신히 재회한 첫사랑을 병으로 떠나보냈던 한국방송 <솔약국집 아들들>의 진풍까지, 손현주는 자주 실패했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고 그 상처로 몸부림쳤다. 어쩌면 그건 손현주가 연기해온 인물이 대부분 서민, 소시민이라는 점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손현주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소시민이고 동네 아저씨이며, 실제의 손현주도 그런 사람”이라고 평한 그는 작품 속에서 대개 힘없고 평범한 인물이었다.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처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건 아니라서 알량하게나마 잃을 것은 있고, 그걸 제대로 지켜낼 만한 권력이나 재력을 갖춘 건 아니어서 무언가를 잃을지 모르는 위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인물 말이다. 말하자면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들 중 대다수와 닮은 인물을 연기하며, 손현주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실패와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상실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온 셈이다. 그것도 지난 23년간 말이다. 물론 우리 중 대부분은 아마 평생을 <황금의 제국> 속 최민재가 누리고자 하는 삶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수천, 수백억을 날리고도 식탁에서 아버지에게 꾸지람 한번 듣고 나면 끝인 세계”인 재벌 가문의 일원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큰아버지와 사촌 형제들을 모두 무찌르고 일인자가 되어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우리로선 그저 뉴스로나 전해 듣는, 어슴푸레한 상상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최민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더럽혀진 자존심과 긍지를 어떻게든 수습해 굴욕을 견디고, 사랑 없는 거짓 결혼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부와 계급을 떠난 인간 본연의 감정에 가깝다. 그리고 상실과 좌절의 질감을 가장 생생하게 그려 보일 줄 아는 손현주의 몸을 빌리면서, 최민재는 냉혹한 인물들로만 가득한 <황금의 제국> 안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싶은 악역으로 완성됐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린 손현주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성취를 보고 있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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