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7.26 19:39 수정 : 2015.10.23 14:44

<수사반장>(1971), <여명의 눈동자>(1991), <모래시계>(1995), <태왕사신기>(2007), <신의>(2012)까지. 시대를 풍미한 드라마 제목을 하나씩 읽어가다 보면 작품을 연출한 드라마 피디(PD)의 인생도 함께 떠오른다. 고 김종학 피디의 2004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인간시장’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그는 늘 시대의 모순을 짚어냈다
어느 순간 한류·대작 성향에 매몰돼
재능 놓쳐버린 천재감독 김종학
외주제작의 ‘피해자이자 가해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믿을 수가 없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한국 드라마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김종학 감독이 세 평짜리 고시텔에서 연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쉬운 종류의 일은 아니니까.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들을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신의>(2012) 관련 송사로 괴로워하고 억울해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김종학 감독과 제작사 대표는 출연료 미지급과 관련해 횡령 및 배임 혐의로 피소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막지 못해 괴로워하던 부채는 약 6억원, 정말 급한 액수는 3억여원이었다고 한다. 그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제작·감독한 <태왕사신기>(2007·문화방송)의 제작비가 430억원, 유작이 된 <신의>의 제작비가 132억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너무나도 허망한 결말이다. 향년 예순셋, 한국 드라마계를 대표하는 감독의 최후는 그렇게 쓸쓸했다.

김종학 감독 사후 며칠간, 이 죽음의 직간접적인 사유가 된 드라마 외주제작 시스템에 대해 많은 말들이 나왔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김준모 사무총장의 말처럼 김종학 감독은 잘못된 외주제작 시스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그는 배우를 담보로 방송 편성과 투자를 확보하는 제작 방식으로 몇몇 스타 배우, 연출가, 작가들의 몸값을 턱없이 높이는 데 일조했고, 드라마 제작은 점점 예측 불가한 도박에 가까워졌다. 채널 수는 제한되어 있는데, 외주제작사는 1000개가 넘는 환경은 덤핑에 가까운 계약을 불러왔고, 수입은 적은데 돈 줘야 할 이들은 많다 보니 적잖은 스태프와 조연 배우들이 임금을 늦게 받거나 덜 받는, 혹은 아예 못 받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상황이 이러니 전작에서 생긴 손실금을 차기작의 투자금액으로 메우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김종학 감독은 <신의>에서 생긴 손실금을 중국에서의 새 프로젝트로 메우려다 좌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김종학 감독의 죽음은 이 모든 부조리를 도마 위에 올렸다. 운이 좋아 세간의 관심이 금세 식지 않고 진지한 담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런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충분히 제기된 시스템에 대한 논의에, 내가 더 붙일 말은 지금으로선 없다. 다만 시스템이 아닌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고인이 가시는 길에 몇마디 송사로 남길 수 있으리라.

문화방송에서 <동토의 왕국>(1984), <퇴역전선>(1987) 등을 만들며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던 김종학 감독이 본격적으로 흥행 가도를 타기 시작한 작품은 1988년 작 <인간시장>이었다. 정의감이 남다른 청년 장총찬(박상원)이 신출내기 프로듀서 오다혜(박순천)와 함께 사회 부조리를 찾아내 응징한다는 줄거리는 그저 통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신매매나 복지원의 인권유린과 같은 시대의 모순을 응시하는 사회 고발적인 면모를 지녔다. 송지나 작가와 호흡을 맞춘 두번째 작품이었던 <인간시장>의 성공으로, 김종학 감독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연출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87년 이후 어느 정도 사회 분위기가 유해졌다 해도, 여전히 일개 드라마 감독이 “드라마에도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인간시장>과 <우리 읍내>(1988)를 찍던 시절의 김종학은 그럴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었다.

김종학 감독의 대작 성향은 <동토의 왕국>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었으나, 이때만 해도 그의 작품은 단순히 규모만 큰 대작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재해석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제작비 72억원의 대작 <여명의 눈동자>(1991)는 분명 신생 방송사 에스비에스에 대한 문화방송의 견제 목적이 아니었다면 제작이 불가능한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같은 시기 한국 드라마가 차마 건드리지 못한 한국사의 역린을 과감히 건드리는 문제작이기도 했다. 일본제국에 충성을 바치며 제 목숨을 보전하던 이들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한국 현대사의 부끄러운 장면이나, 그 전까진 아무도 소리 내어 이야기하지 않았던 제주 4·3 항쟁의 참상을 과감하게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여명의 눈동자>는 단순한 대작이 아니라 시대의 모순을 말하는 걸작이었다. ‘반공 어린이 웅변대회’라는 게 아직 남아 있던 1991년에, 빨치산 최대치(최재성)가 한국군 장하림(박상원)에게 “만약 날 구한 게 소련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면 지금 자네 자리에 내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파격 그 자체였다.

에스비에스를 견제한다는 명분하에 거액의 제작비, 2년 4개월의 제작기간,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의 활용을 모두 허락받았던 김종학 감독의 차기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에스비에스의 간판 드라마 <모래시계>(1995)였다. 1991년 개국 후 수년이 지나도록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에스비에스는 갓 독립한 김종학 감독을 ‘모셔’왔다. 이번에도 전례 없는 거액의 제작비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에 대한 접근이 보장되었고, 다시 한번 쉽지 않은 기회를 얻은 김종학 감독과 송지나 작가는 오랫동안 준비했던 ‘운동권 학생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었다. 5공 퇴진 후 처음으로 5·18 광주민주항쟁, 와이에이치(YH)방직 사건이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했고, 실제 광주시에서 광주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재현한 광주민중항쟁 장면은 신군부의 잔인함을 안방극장에 폭로했다. 다시 한번, 시대성을 담보한 대작이 등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김종학 감독의 작품에서 시대성이 사라졌다. 에스비에스 <대망>(2002)은 조선의 역사에 가상의 왕 ‘승조’를 끼워 넣으며 시대의 색을 지웠고, <태왕사신기>는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라 하기엔 너무 멀리 나간 판타지가 되었다. 430억 규모의 판타지 사극을 두고 사람들은 거장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왜곡된 내수 시장에서 수익을 안정적으로 올릴 수 없으니 해외 시장으로 나가보자는 상업적 도박에 가까웠다. 김종학 감독은 <태왕사신기>에 대해 여전히 우리 시대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했지만, “고구려의 사신과 같은 개념을 해외 시청자들에게 알리려면 판타지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대작의 플랫폼을 차용했던 감독이, 이젠 대작을 만들기 위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짜낸 것이다. 세계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포부, 이 작품이 망하면 한류에 타격이 올지도 모른다는 애국심에의 호소가 등장했다.

<태왕사신기> 종영 직후, 김종학 감독은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차기작의 시놉시스를 보여주었다. “생활환경이 상반된 두 젊은이가 조선업체에 입사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 조선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리는 내용”이었다는 그 시놉시스에 대해, 그는 “드라마를 통해 한국 산업의 진취성과 발전상을 외국 소비자들에게 서서히 주입하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라고 첨언했다. 자신이 발 디딘 땅을 보고 사회상에 대해 화두를 던지던 감독이, 한류 열풍을 타고 ‘해외에 한국의 발전상을 주입’한다는 기획을 하던 그 순간이 어쩌면 그의 내리막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빛나는 재능을 지녔으되 어느 순간 한류 열풍과 대작 성향에 매몰되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놓쳐버린 천재 감독, 누구보다 현장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현장의 스태프에게 가혹한 노동환경과 임금체불을 남긴 실패한 제작자, 김종학 감독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남긴 빛과 어둠이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작년이었나요. 일 때문에 감독님의 작품 <여명의 눈동자>를 20여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제아무리 <여명의 눈동자>라 해도 물경 20년 전 작품이니, 조금은 촌스럽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웬걸. 성우들의 후시 더빙을 제외하고는 거의 세월을 느낄 수 없는 작품이어서 충격을 받았더랍니다. 여덟살짜리 꼬맹이 시절 보았던 작품을 스물아홉이 되어 다시 보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지요. 새삼 감독님이 얼마나 대단한 연출가였는지 다시 느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발인이시지요.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를, 그 찬란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감독님을 보내드립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