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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2 19:22 수정 : 2015.10.23 14:44

티브이엔 <꽃보다 할배>는 ‘할아버지 배우’들의 소탈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나영석 피디답게 사람과 이야기에 집중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그의 대표작인 <1박2일>보다도 따뜻하다. <씨네21> 자료사진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짜증의 과녁이자 악역 자처해
새 반응과 드라마 이끌어냈다
그가 만든 작품의 초점은 사람
포맷·문법 걷어낸 자리에는
삶 닮은 예측불허 재미가 찼다

일 때문에 초면인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 내 맞은편에 앉은 이는 갑자기 <티브이엔>(tvN) <꽃보다 할배>의 나영석 피디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나 피디 정말 밉상이더라고요. 안 그래도 어르신들 모시고 낯선 유럽을 돌아다니느라 이서진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을 텐데, 자꾸만 옆에서 깐죽거리면서 약 올리는 게 미워보였어요.” 아마 티브이 관련 글을 쓰는 나에게 동의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불쾌함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받고 싶었으리라. 나는 그이가 한번도 남들과 배낭여행을 가본 적이 없거나, 적어도 <한국방송>(KBS) <해피선데이> ‘1박2일’ 시즌1을 본 적이 없는 게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 보았다.

원래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란 게 그렇다. 현장에서 갑작스레 계획이 바뀌는 일은 다반사요, 일행과 마음이 안 맞아 신경전을 벌일 일도 태산이다. 당장 “오늘 점심 뭐 먹지”조차 뜻이 갈리고 나면, 웃으며 함께 여행을 떠난 동행도 철천지원수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비슷한 연배끼리는 화끈하게 한판 붙거나, 잠깐 따로 여행을 하다가 중간 지점에서 다시 만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갈등을 풀어볼 수라도 있지. 하지만 이서진에게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이 어디 그럴 수 있는 상대인가. 그런 이서진에게 남은 옵션은 하나뿐이다. 일행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기 센 할배들 사이에서 이서진이 고뇌할 때, 나영석 피디는 언제나 슬그머니 화면 안으로 들어와 이서진에게 말을 건네고, 그에게서 불평과 불만을 끌어낸다. 그렇게 한 차례 푸닥거리를 하고 나면 이서진은 다시 성실한 가이드 모드로 돌아온다.

적당한 순간에 등장해 여행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짜증의 과녁을 자청하는 사람, 멀끔한 연예인을 데려다 극한상황에 던져놓고 괴롭히며 그 안에서 새로운 반응과 드라마를 이끌어내는 악역, 나영석 피디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프랑스의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렌터카 업체를 못 찾고 헤매는 이서진을 놀리는 순간, 혹은 ‘1박2일’에서 멤버들에게 말도 안 되는 미션을 던져주고는 “저희가 이미 다 시뮬레이션 해봤고요. 여러분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겁니다”라고 덤덤한 어조로 통보하듯 말하는 순간, 나영석 피디의 눈은 별처럼 반짝인다. 애초에 ‘1박2일’이란 프로그램 포맷을 탄생시킨 이유가 여행지 소개가 아니라 복불복을 통한 연예인의 생생하고 절박한 리액션과 야외 취침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했던가. 다른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대개 카메라 뒤에 서서 전체 상황을 조율할 때, 나영석 피디는 카메라 앞에서 출연진을 괴롭히는 악역을 자처한다.

나영석 피디라고 처음부터 카메라 앞에 등장하는 것을 즐겼던 것은 아니다. ‘1박2일’을 연출하던 2011년,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나영석 피디는 그저 제작진이 사전에 검증해보고 정한 미션 제한시간을 늘려달라고 협상을 거는 멤버들이 처음엔 짜증이 났고, 생각해보니 그 또한 미션을 통과해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한 멤버들 나름의 진정성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그렇다면 자신과 멤버들이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보여줘도 나름의 ‘예능 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부연한다. 예전엔 카메라를 끄고 나눴을 촬영 현장의 속사정을 카메라가 돌아가는 앞에서 그대로 보여주기로 결심한 셈이다. 절박함에서 오는 재미를 담기 위해 고안한 틀을, 절박함 자체를 담아내기 위해 유연하게 깨고 나가면서 ‘1박2일’은 복불복 게임 중심의 쇼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아래 흐르는 정서가 중심인 쇼로 거듭났다.

나영석 피디는 작품의 초점을 ‘게임’이나 ‘여행지’가 아니라 ‘사람’에 맞춘다. 게임 자체가 빚어낼 수 있는 웃음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여행지가 주는 감동과 아름다움만으로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결국 보는 이들의 허를 찌르고 웃음을 끌어내는 예측 불가능성을 지닌 것은 게임에 임하는, 혹은 여행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이다. 나영석 피디는 여행지 자체보다 그곳에 도착하는 데 이르는 과정과 출연자들의 감상에 더 집중한다.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의 진짜 묘미가 무엇인지를 귀신같이 파악한 것이다. 엠티를 떠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한 이들이 특정한 순간의 경험과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이지, 여행지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는 부차적인 문제 아닌가. ‘1박2일’ 백두산 특집에서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길고 고통스러운 터널 계단을 천지만큼 길게 보여준다거나, <꽃보다 할배>에서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아름다움보다 그 길을 걷는 신구의 “내가 나중에 죽어갈 때에도 이 모습의 잔상이 남아 있을 것 같다”는 말 한마디에 더 주목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한’ 이들의 범주는 그저 출연자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꽃보다 할배>에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등장해 자신을 드러낸다. 나영석 피디와 이우정 작가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출연자들과 무람없이 대화하고 그 상호작용은 고스란히 극에 반영된다. 베르사유 궁전의 표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선 이서진은 티켓 자동판매기를 찾아가면서 자기 대신 브이제이를 줄에 세워 놓지만, 이서진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야 하는 브이제이는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줄에서 이탈한다. 낯선 나라에서 일행이 오래 자리를 비웠을 때 브이제이가 느끼는 당혹과 망설임은 고스란히 화면에 담겼고, 기껏 세워 놓은 브이제이가 줄에서 이탈했단 사실을 안 이서진은 진심으로 낙담한다. 그 순간 브이제이는 단순한 스태프가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의 긴 줄을 함께 경험한 여행의 일원이 된다.

게임이라는 틀을 깨고 스태프와 출연자 사이에 암묵적으로 그어진 선을 넘자 나영석 피디가 그리는 세상은 점점 더 카메라 밖 실제 세상의 모습과 닮아간다. 평균 연령 만 74세의 노인들을 데리고 벌칙을 건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꽃보다 할배>에는 복불복도 선착순 레이스도 없다. 그저 모든 여행 일정을 출연자들에게 맡기고 가만히 그들의 상호작용을 지켜볼 따름이다. 파리 숙소에 도착한 날 밤, 침대에 단 카메라를 치우라고 백일섭이 역정을 내자, 독하기로 소문난 나영석 피디는 금세 꼬리를 내리고 스태프들을 동원해 애써 설치한 카메라를 치우기 시작한다. 제작진의 입장을 내세워 재미를 위해 카메라 설치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히 어르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나영석 피디의 진심은 고스란히 쇼에 반영된다. 자신이 써내려간 문법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겠지만 덕분에 더 ‘진짜’에 가까운 순간을 쇼에 담아낼 수 있었다.

만화가 신일숙 작가는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마치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영석 피디는 점점 안정된 포맷이 아니라 예측불허의 사람에게 집중하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다. 2012년 <씨네21> 고현정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돌발변수가 생기면 큰일났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계획을 버리고 주어진 것 안에서 뭔가 우당탕 쿵쾅 만들어야 할 때 더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방송> 퇴사 직전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인간의 조건> 기획회의 때도 그는 “게임이 있고 뭐가 있으면 뭐가 나올지 다 예상이 되지 않냐. 그것보다는 뭔지 모르겠다는 궁금증이라도 생기고 그래야 성공 가능성이 있다”며 현재의 포맷을 지지했다고 한다. 나영석 피디는 이제 거의 모든 포맷을 내려놓은 채 오로지 사람과 돌발변수로만 이루어진 쇼를 만들고 있다. 도대체 어떤 그림이 나올지 알 수 없어 매주 방송을 기다리게 만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꼭 닮은 예측불허의 쇼.

그리고, 남은 이야기.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나영석 피디가 밉상인 건 이런 거예요. 혹시 군대 다녀오셨나요?”

“예, 다녀왔죠.”

“훈련소 동기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애가 있어도, 조교가 악마 같은 사람이면 그 동기와의 갈등도 좀 덜하지 않나요? 함께 욕할 공동의 적이 생기니까.”

“아무래도 좀 그렇죠.”

“나영석 피디가 이서진을 약 올리는 것도 그런 거죠. 이서진이 화가 난다고 이순재 선생께 화를 내겠어요, 그 상황에서?”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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