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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9 19:19 수정 : 2015.10.23 14:43

부드럽게 깔리는 섬세한 보컬이 성난 마음을 포근히 감싸안는다. 최근 1집 앨범 <이너 차일드>를 발표한 존 박은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 앞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귀공자의 느낌은 여전하지만 친근함이 더해졌다. 뮤직팜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슈스케2’로 방송 시작한 존 박
제작진이 만든 ‘엄친아’ 캐릭터는
그에게 어색한 굴레였다
16개월 공백 뒤 나온 첫 앨범
대중의 선입견 깨부순 그는
자유로운 아티스트로 태어났다

<엠넷>(Mnet)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송의 적>은 오래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헷갈리는 종류의 쇼다. ‘오글거리는 지적 허세와 젊은 여성에 대한 무한한 관심으로 무장한 이적’이란 캐릭터는 분명 설정이나, 본인 스스로도 어색해하는 이적의 발연기를 따라 한참을 보다 보면 ‘어쩌면 조금은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후배들에게 야한 농담 하는 거 좋아한다”던 윤종신의 말이나, “처음 만난 곳은 나이트클럽이었다”던 장윤주의 말들이 떠오르면서 의구심은 배가된다. <음악의 신>의 이상민은 연기라도 그럴싸하게 했지, 이적의 발연기에 갸우뚱하게 될 날이 오다니. 낄낄거리면서 보다가도 한편으론 어딘가 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적이야 그렇다 치고, 이적의 옆에 멀뚱하게 서서 얼빠진 미소를 지어 보이는 존 박의 바보 연기조차 ‘조금은 진짜’일 거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문화방송>(MBC) <무한도전>을 본 이후부터였다. “어제는 왜 그러셨어요? 이미 이적씨께서 다 말씀하셨어요. 왜 그랬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기자로 분장한 보조출연자들은 전후 사정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진실을 말해달라’며 존 박을 몰아세웠다. 그냥 좀 많이 당황해하겠지 싶었던 몰래카메라는, 존 박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예, 사실입니다.” 자신이 한 적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사안임에도, 일단 ‘이적이 인정했다’는 한마디 말에 그저 긍정해버린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저는 이적씨를 따르니까. 그분이 말씀하셨다면 사실이겠죠.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무한도전> 멤버들은 화급히 몰래카메라를 끝낸다.

존 박의 이런 답답할 정도의 순진함이 드러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케이(K) 2>가 끝난 뒤, 우승자 허각과 준우승자 존 박은 <에스비에스>(SBS)의 토크쇼 프로그램 <강심장>에 초대받았다. 함께 나온 게스트들 중 토니 안이 농담 삼아 “우리 기획사로 들어오라. 탐나는 인재다”라고 이야기하자, 존 박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엠넷> 방송사에서 ‘아직까지 계약이 진행중이니 밖에서 소속사 이야기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그러니 정말 영광이지만 여기서 소속사에 대해 말했다간 혼난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아직 방송이 서툴고 한국식 농담에 완전 적응하진 못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큰 눈을 끔뻑이며 사람들이 왜 웃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습이 그의 본질에 가까울 거란 생각은 미처 못 했다.

아마 눈에 뻔히 보이는 순진함조차 제때 알아보지 못한 건, <슈퍼스타 케이 2>에서 보여준 존 박의 이미지가 너무 깊게 각인되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올곧게 자란 매너 좋은 청년, 모든 여성 참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준수한 외모와 훤칠한 키, 매혹적인 중저음의 소유자,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엘리트. 제작진은 예선 단계에서부터 존 박의 화려한 면모들만 부각시켰다. 물론 제작진이 존 박의 맞수로 설정한 허각과의 대비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으리라. 허각은 썩 좋지 않은 가정형편 탓에 환풍기 수리공으로 일했고, 작은 키에 순박한 외모를 지녔으며, 중저음보다는 날카로운 고음에 능한 사람이었으므로.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썩 온당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안에 참가자들의 캐릭터를 세워 대중에게 제시해야 하는 장르적 특성상, 오디션 프로그램은 종종 그렇게 명확한 캐릭터를 요구하곤 한다. 설상가상 <슈퍼스타 케이 2>는 시리즈 사상 흥행과 비평의 두 마리 토끼를 가장 잘 잡았다고 평가되는 시즌이었고, 덕분에 쇼를 한번이라도 본 시청자들은 쇼가 제시한 캐릭터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케이블 사상 유례가 없던 시청률 19.379%(엠넷, 케이엠티브이(KMTV) 동시 생방송 시청률 합계), 그 위압적인 시청률 앞에서 제작진이 잡아둔 캐릭터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가수들이 겪는 딜레마가 있다. 쇼는 끝났고, 다음 시즌이 시작되고 더 뛰어난 참가자들이 등장하면 스포트라이트는 다시 그들에게 옮겨갈 것이다. 이 초조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여태껏 쇼에서 보여준 적 없는 매력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쇼에서 보여준 매력을 더욱 극한으로 밀어 보이거나. 연기를 통해 자신의 다른 면모를 보여준 서인국이나 강승윤, 손진영은 전자라면, 목소리의 특성을 더욱 살려 승부를 건 허각이나 이하이, 김예림이 후자에 속한다. 이렇게 써놓으니 간단해 보여도, 말이 쉽지 사실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자를 택하자니 검증이 안 된 매력을 보여주는 건 어딘가 도박인 것 같고, 후자를 택하자니 이미 쇼의 제작진이 캐릭터를 활용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 같은 것이다.

존 박 또한 한동안 이런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지 <지큐>(GQ)와의 인터뷰에서 존 박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혼자 있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화면에 나오는 내 모습들 보면 왠지 싫었다. 뭔가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엄청난 걸 잃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이나 인기에 대해서도.” 단순하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 만족할 수 있었던 한 청년이, ‘잘생기고 훈훈한 엘리트 청년’이라는 캐릭터로 얻은 인기 앞에서 자기 검열을 하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 또한 깊어졌다. <엠넷>의 관리하에 있는 동안 발매한 두 건의 디지털 싱글을 제외하면, 존 박은 <슈퍼스타 케이 2> 이후 본인의 이름을 걸고 낸 첫 작품 <노크>(Knock)를 내기까지 꼬박 16개월을 기다린다.

이런 느릿한 행보는 예기치 않은 효과를 불러왔다. 자신에게서 스포트라이트가 어느 정도 옮겨진 이후에 발걸음을 재개한 덕에,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엄친아’ 캐릭터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워진 것이다. 유희열이나 이적과 같이 그를 아끼는 선배들은 그의 얼굴 크기를 가지고 농담을 걸거나,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에 얼룩무늬 개 인형 옷을 입히고는 ‘점박이’라고 부르며 그를 무람없이 대했고, 대중의 뇌리에 새겨진 ‘시카고 엄친아’라는 이미지는 조금씩 흐릿해졌다. 발라드 가수에게 망가지는 게 늘 좋은 선택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의 선입견이 약해진 덕분에 오롯이 그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 셈이다.

최근 발매된 존 박의 정규 1집 <이너 차일드>(Inner Child)는 그의 목소리가 지닌 스펙트럼을 쭉 펼쳐 보인다. 타이틀곡 ‘베이비’(Baby)에서 보여주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지워져간다’나 ‘어디 있나요’, ‘그만’에서 선보이는 기름기 없이 담백한 창법, 히든 트랙 ‘시핑 마이 라이프’(Sipping my life)에서 보여주는 두터운 볼륨의 블루지한 목소리까지, 존 박은 남들이 보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들을 차곡차곡 쌓아 첫 앨범을 완성했다. <방송의 적>이 보여주는 바보 연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기와는 무관하게 <이너 차일드>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자기 검열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아티스트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를 증명한다.

사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그렇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지는 판타지를 충족해줘야 하는 직업인 동시에, 다른 어떤 직종보다 더 자신을 잘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작업을 병행하는 동안 적지 않은 이들이 혼란을 겪거나 안으로만 모순을 쌓으며 마음이 다치기도 한다. 그리고 존 박은 이 직업상의 한계를 전에 없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다. 대중의 선입견과 판타지를 바보 연기로 완전히 깨부숴 걷어낸 뒤, 그라운드 제로 위에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새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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