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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30 19:41 수정 : 2015.10.23 14:43

드라마 <투윅스>에서 거짓된 인생을 사는 국회의원 조서희 역을 맡은 배우 김혜옥씨. 귀여운 눈웃음을 감추고 살벌한 악인을 연기해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문화방송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등장시간만 놓고 보면, 문화방송(MBC) 수목드라마 <투윅스>에서 김혜옥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작품은 어디까지나 누명을 쓴 채 딸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장태산(이준기)의 여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같은 악당 중에서도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 된 악당 문일석(조민기)의 비열함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다. 국회의원 조서희 역의 김혜옥이 차지하는 물리적 시간은, 잠시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면 놓치기 십상일 정도로 짧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투윅스>를 보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김혜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짧은 순간들이 다 하나같이 한번 보면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단순히 조서희가 선한 겉모습 뒤에 사악한 속내를 지닌 인물이어서라거나, 그가 드라마의 최종 보스 같은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혜옥은 청렴하고 정의로운 국회의원과 야욕에 불타오르는 악당 사이의 간극을 아주 은밀하고 매끈하게 이어붙인다.

<투윅스> 5회의 한 장면, 자신의 범죄 모의현장을 목격하고 그에 대해 묻는 소녀에게 조서희는 인자한 말투로 말한다. “너 시력이 몇이니? 눈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불과 몇 시간 전 소녀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며 격려를 하던 순간과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뻔뻔스레 침묵을 강요하는 이 장면은, 앞뒤 맥락을 지우고 보면 조서희가 악인인지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매끈하게 찍혔다. 가히 ‘순수한 악’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사악함과 유능함. 그동안 한국의 중년 여배우들이 이 정도의 악역을 맡으려면 보통 궁중사극 속 비빈들을 연기하거나, 누군가의 시어머니로 존재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혜옥이 연기한 조서희는 기념비적인 역할이다. 그간 눈이 게을렀던 사람들은 또 ‘김혜옥의 재발견’을 운운하기도 한다.

꼭 이번 작품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돌이켜보면 김혜옥은 늘 평범하다고 하긴 어려운 독특한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한국 티브이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어머니’ 캐릭터들에게 예상하는 덕목인 인내, 수더분함, 인자함 등을 고루 갖춘 인물들보다, 어딘가 한구석 비틀려 있는 어머니를 연기하는 순간 대중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아들이 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곧이곧대로 믿는 <닥터 깽>(문화방송·2006)의 천진난만한 어머니 연지, 커밍아웃을 하고 이혼을 당한 뒤 10년 만에 재회한 딸 앞에서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결국 술에 취해 무너져 내리던 한국방송(KBS) <드라마스페셜>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2012)의 향자,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자신과 아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며느리를 비교하며 질투심에 어쩔 줄 모르던 <내 딸 서영이>(한국방송·2012)의 지선과 같은 어머니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캐릭터들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티브이 드라마에서 기대하는 전형적인 어머니 상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캐릭터. 한동안 그의 이름 앞을 따라다니던 수식어 ‘푼수 같은 엄마’, ‘엉뚱한 엄마’와 같은 표현들은, 그가 표현해 온 인물들의 독특함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어쩌면 김혜옥에게 이런 캐릭터들이 찾아온 것은 그가 지닌 특유의 이미지와 연기 테크닉 덕인지도 모른다. 유달리 큰 김혜옥의 두 눈은 인물이 겪는 행복과 슬픔, 불안과 질투, 시기와 체념, 허세와 우울과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쇼윈도처럼 선명하게 전시한다. 최근 그가 찍은 건강음료 광고 속에서 이런 장점은 극대화된다. 딸이 밖에서 아무거나 마시고 다니며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는 어머니의 불안을, 김혜옥은 대사 한마디 없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표현해 낸다. 여기에 그의 독특한 목소리가 더해지면서 감정은 더더욱 증폭된다. 대사 한 문장 안에서도 낙차가 큰 곡선을 그리는 어조와 리듬은 듣는 이의 정서를 함께 출렁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정의로운 국회의원이자
불타는 야욕의 악당
그 사이 간극 매끈하게 이었다

유난히 큰 눈에 여러 감정 실어
늘 독특한 인물 연기한 김혜옥
강렬함을 내부로 수렴 표현해
모순 지닌 복잡다단 캐릭터에
일상 질감과 일관성 담았다

타고난 육체와 그를 능숙히 다룰 줄 아는 테크닉의 조화는 강렬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기 좋은 조건이 되어 주었다. 김혜옥이 채 쉰도 되기 전에 건망증 심한 셋째 할머니 배역을 맡은 한국방송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2006)나, 50대 중반에 벌써 기초생활수급 대상 노인 신자를 연기한 영화 <육혈포 강도단>(2010)처럼 제 나이보다 10살가량 많은 배역들을 자주 소화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리 분장의 힘을 빌려도 그렇게 나이 든 인물로 보이지 않는 외양을 지녔지만, 노년의 쓸쓸함과 우울을 힘있게 표현해내는 그의 연기 속에서 노인 캐릭터는 탄탄한 설득력을 획득했다.

김혜옥의 연기가 진정 파괴력을 발휘하는 지점은 그 강렬함을 과시하는 대신, 내부로 수렴해 표현하는 절제의 순간들이다. 우리는 흔히 그리스 비극의 인물들처럼 감정을 폭발적으로 발산하는 종류의 연기만을 높게 쳐주는 우를 범하곤 한다. 반면 김혜옥은 캐릭터가 지닌 다양한 면모들을 과장하는 대신 덤덤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남이 보았을 때 괴팍하고 특이해 보이는 인물의 특성조차, 그 인물 본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고 인생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물을 진실되게 연기하려면 캐릭터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연기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자기가 경험했던 일 중 (캐릭터가 겪고 있는 상황과) 비슷한 부분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거다.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과거의 기억 속에는 비슷한 장면들이 다 축적이 되어 있다”고 답하는 김혜옥에게, 어쩌면 연기란 그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김혜옥은 인물의 헤픔과 서투름, 야욕과 모정 같은 모순된 면모들을 그 인물의 연속선상에서 그려낸다. 넘치다 못해 헤픈 수준의 정 때문에 이 남자 저 남자를 떠돌다 죽음을 앞두고 딸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영화 <가족의 탄생>(2006) 속 철없는 엄마 매자를 연기하면서, 김혜옥은 슬픔을 발산하는 대신 속으로 품는다. 마치 자신은 눈이 올 때까지 살아있진 못할 것을 안다는 듯 담담한 말투로 “올해는 눈이 많이 오려나. 나는 눈이 좋은데…”라고 무심히 내뱉는 순간의 공기, 고궁 가이드로 일하는 딸 선경(공효진)의 카메라 뷰파인더 안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마지막 표정에서, 평생 여기저기 정을 주고 살았으나 정작 딸에겐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서툰 모정은 눈물 없이도 생생히 다가온다.

극을 지배하는 악당이지만, 혼자 식사를 하는 동안 노트북을 펼쳐놓고 외국에 보내둔 아들을 인터넷 카메라로 바라보는 <투윅스>의 조서희는 또 어떤가. 복잡다단한 캐릭터들에 일상의 질감과 일관성을 부여해 이질감 없이 그려내는 이런 절제와 수렴의 테크닉이야말로 김혜옥이 지닌 힘이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

<투윅스>의 소현경 작가와 함께했던 전작 <내 딸 서영이>에서, 서영이(이보영)의 시어머니인 차지선은 가장 자주 배신당하고 가장 자주 우는 인물이다. 가족의 비밀들이 하나둘씩 벗겨지며 쌓인 울화를 풀 길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던 지선은, 급기야 드럼 학원을 찾아가 드럼을 때리기에 이른다. 아무리 며느리와 함께 난타 공연을 보며 행복해했던 시절의 추억 때문에 들어섰다는 설정이라 해도 조금은 어색하다고 생각할 무렵, 지선이 슬프고 억울하고 분한 감정들이 잔뜩 뒤섞인 얼굴로 서툴게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순간 무리한 설정이 아닌가 의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선을 연기하는 배우가 김혜옥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데뷔한 지 30년이 넘어가는, 그것도 주연이 아닌 조연을 맡은 중견 배우의 연기를 칭찬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단한 내공을 보여줬다’ ‘경륜이 넘치는 연기’와 같은 상투어들로 애매하게 찬사를 보내고, 그런 그들에게 쓸만한 캐릭터를 좀처럼 주지 않는 업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적당히 공치사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배우들은 좀더 상세하고 성대한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 배우가 지닌 육체적 매력과 특유의 아우라, 그것을 통제하는 기술과 그간의 커리어에서 보여준 그만의 독특한 인장에 대한 감사를 보내는 글이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이 가난한 글이 합당한 찬사가 되기를 바란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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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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