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오래 두고 볼 일이다. 배우 이서진은 아비를 잃은 왕, 상처를 지닌 전문경영인, 비극적인 운명의 장수로 대중들과 만났다. 그렇게 진중하고 비극적인 이미지의 그가 ‘투덜이 짐꾼’으로 예능에 등장했을 때 이렇게 웃길 줄을 누가 알았을까. 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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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사생활 드러내지 않던 그 불손한 태도 오해 쌓여
하지만 ‘꽃보다 할배’ 통해
꾸밈없는 ‘반전 매력’ 발산하며
오해 넘어 대중의 관심 얻어 <티브이엔>(tvN) <꽃보다 할배> 덕인가. 요즘은 어딜 가든 사람들이 ‘만능 짐꾼’ 이서진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할배’들 앞에서는 어떤 불평이나 불만도 내색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모습을 보았느냐. 그가 제작진에게 진심으로 역정을 낼 때 귀엽지 않으냐. 카메라가 있든 없든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할 때 정말 옆집 청년 같더라. 소녀시대의 써니 앞에서 깊게 파인 보조개를 선보이며 정신줄을 놓고 웃을 때는 또 어떠냐 등등. 말하자면 <꽃보다 할배>에서 보여지는 거의 모든 장면들이 사람들 사이에선 화제다. 말을 꺼내는 사람마다 결론은 “이서진 참 귀엽더라”로 귀결되는 이 기묘한 현상. 나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 앞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이서진은 연기로 보여주는 모습 외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거나 예능에 출연하는 일이 거의 없던 사람이었다. 연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연기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니까, 직업이 갖춰야 할 덕목엔 충실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서진은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를 지닌 스타라는 점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스타는 먹고 마시고 입고 말하는 그 모든 일상의 요소들이 대중의 관찰 대상이자 소비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스타의 맛집’을 궁금해하고, 그가 평상시에 입는 ‘사복패션’에 관심을 가지며, 그가 얼마짜리 집을 샀는지에 촉각을 세운다. 이런 상황에서 이서진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하거나 홍보하는 일 없이 그저 연기자로 살았다. 아마 특별히 자신을 내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성격 탓이었겠지만, 의도치 않게 공개된 단편적인 모습들만이 부각되자 마치 그것이 ‘자연인’ 이서진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이런 순간들이다. 과거 <문화방송>(MBC) 드라마 <이산> 제작발표회 때, 현장에 조금 늦게 도착한 이서진을 이순재가 가볍게 책망했던 일이 있었다. 사실 원칙을 중시하는 원로배우가 후배에게 훈계의 말 한마디 한 게 뭐 큰일이겠는가. 토크쇼 같은 데 출연해 ‘사실은 이렇게 된 일이다’라는 식으로 해명을 했다면, 인터넷 매체에서는 그 이야기를 다시 받아 기사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서진은 그렇게 하는 대신 그 일을 크게 거론하지 않았고, ‘부잣집 출신 미남 주연배우면 선배들에게 함부로 해도 되는가’라는 식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들이 등장했다. 유명 여자 연예인과의 두 차례의 공개연애와 공개결별이 있었을 때도, 이서진은 별다른 입장 표명이나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이별 후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떠들지 않은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비슷한 일이 한 차례 더 반복되자 남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시작됐다. 이서진이 배우로서 지닌 이미지가 경쾌한 이미지였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을지 모른다. 유쾌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사람에겐 의외의 진지한 면모를, 진중하고 비극적인 이미지의 사람에겐 의외의 소탈한 면모를 보고 싶어하는 게 대중의 심리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서진은 항상 진중한 역을 도맡아 했다. 그는 아비를 잃은 왕이었고(<이산>), 상처를 지닌 전문경영인이었으며(<불새>), 정인을 잃을 위기에 처한 무인이거나(<다모>),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조직폭력배 보스였다(<연인>). 심지어 제일 최근작은 비극적인 운명의 장수 계백이었다.(<계백>) 진중한 히어로에게서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던 대중은, 이서진이 굳이 일상 속에서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자 앞서 언급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자연인’ 이서진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제한된 정보는 억측을 부른다. 이미지 자체가 상품이 되고, 가십이 유용한 정보처럼 거래가 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작은 오해는 시나브로 그 몸집을 불렸다. 이서진이 나영석 피디(PD)의 전작 <한국방송>(KBS) <해피선데이> ‘1박 2일’ 절친 특집에 이승기의 절친 자격으로 출연했을 때, 적잖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도통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 이서진이, 소속사 후배 이승기의 제안으로 덜컥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을 한다는 게 의외였던 것이다. 아니, 적극적으로 게임에 참여하거나 투지를 불태울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뭐 하러. 과연 이서진은 ‘1박 2일’에서도 특별히 쇼에 맞춰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기보단, 피곤하면 앉고 졸리면 멍하게 만사가 다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그에게 이수근은 ‘미대 형’이라는 별명을 붙여 캐릭터를 잡아 주었지만, 무성의하게 방송에 임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캐릭터를 만들어 이미지를 포장해 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잠시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보자.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연기를 벗은’ 연예인을 출연시키는 장르의 예능은 ‘리얼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리얼’을 팔아야 하는 양가적 속성을 지닌다. 이제 리얼리티 쇼가 진짜 있는 그대로의 연예인의 모습을 담아낸다고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재미를 위해 연출된 상황을 집어넣거나, 상세 대본까지 만들어주는 식의 쇼들이 꼬리를 밟히면서 사람들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리얼’을 믿지 않게 되었다. 조작 논란, 대본 논란 등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고, 사람들은 속 편하게 “어느 정도는 다 연출이 들어갔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아예 이런 심리를 뒤틀어 이용해 ‘진짜 같은 가짜’를 들이미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1박 2일’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이나 이미지 또한 ‘포장’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그런 탓이었다. 출연자들의 연령대를 고려해 어려운 미션이나 게임 따위를 싹 제외시키고 진짜 여행만 하는 <꽃보다 할배>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굳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꾸밀 생각을 안 하는 할배들과 그들을 수발 드는 이서진의 모습은 연출이나 대본으로 만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꽃보다 할배>의 제작진은 이서진에게서 가장 날것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를 속이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 속으로 던져 넣는 초강수를 뒀다. 걸그룹 멤버들과 함께 가는 여행이라는 거짓말에 농락당한 이서진은, 넋이 나간 모습에서부터 화난 모습, 짜증난 모습, 선배들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히 원하는 모습들을 여과 없이 카메라 앞에 보여주었다. 그 안에서 이서진은 시청률을 보증하는 스타이기 이전에 그냥 어려운 어른들을 모시고 해외여행에 나선 40대 한국 남성이 되었다. 무언가를 꾸며서 사람들 앞에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남자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쇼에 출연하면서 대중과 그 사이에 있던 미묘한 오해를 허물게 된 것이다. 점점 더 ‘진짜 진짜 같은 것’에 목을 매는 리얼리티 쇼의 열풍은 가실 듯 가시지 않은 채 수년간 한국 예능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이것이 이 연예인의 진짜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고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미 이 장르의 속성을 꿰고 있는 시청자들은,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콘셉트일까를 골똘히 생각하며 티브이를 본다. 다들 ‘리얼’을 바라지만 아무도 ‘리얼 버라이어티’의 ‘리얼’을 쉽게 믿지는 않는 이 이상한 장르 안에서, 이서진은 오해를 뛰어넘어 대중을 자기 편으로 돌려 세우는 데 성공했다. <티브이엔> 토크쇼 <택시>에 출연한 이서진은, 농담 삼아 ‘소속사가 <문화방송> <우리들의 일밤> ‘진짜 사나이’가 아니라 <꽃보다 할배>를 섭외해 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가 실감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꽃보다 할배>를 만난 건 천운이었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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