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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13 19:27 수정 : 2015.10.23 14:42

에스비에스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 이요원의 모습을 보며 그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돌아본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기만큼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연기를 꾸준히 단련해왔다. 에스비에스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정제되고 건조한 연기톤
‘황금의 제국’에 딱 맞는 옷
고만고만한 또래 배우와 다른
냉정과 열정 오가는 내면연기
데뷔 16년, 꾸준히 자기 영역 만들어

“성진시멘트 주식 가장 먼저 가지고 오는 사람한테 줄게, 용인 부지. 두번째로 가져오는 사람한텐 종가 기준으로 주식 가격만 주고 매입할 거고. 세번째로 가져오는 사람은, 지켜봐. 민재 오빠, 장태주씨, 어떻게 되는지. 그 사람들하고 똑같이 만들어줄게. 이번주까지야.”

집에서 날뛰는 망둥이 장태주(고수)를 쫓아냈다고 모두가 즐거워하던 식탁 위로, 최서윤(이요원)이 핵폭탄급 발언을 던진다. 상석은 비었으되 사실상 최서윤이 앉은 자리가 상석이나 다름없어진 식탁, 잠시나마 화목했던 가족 식사는 충성 경쟁과 안위가 교환되는 생존의 장으로 변해버린다.

재벌 기업 안의 후계자 경쟁을 소재 삼아 한국 근현대 경제사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황금의 제국>이 이제 마지막 2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서울 신림동 판자촌에서부터 악착같이 기어올라온 주인공 장태주에게 감정이입을 한 시청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인물은 없고 욕망과 속임수로 무장한 인물들만이 등장하는 이 기묘한 드라마에 매료된 시청자들은, 형제자매들의 견제와 계모의 술수, 사촌오빠의 도전을 피해가며 점점 외로워지는 최서윤을 더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극이 진행될수록 좀처럼 제 감정을 드러내기보단 냉정하고 단호한 인물로 변해가는 최서윤을 이요원은 정제되고 건조한 톤으로 그려낸다. 평상시 이요원 특유의 연기톤에 동의하지 않았던 시청자들조차, 이번 작품과 캐릭터 해석만큼은 이요원에게 딱 맞는 옷이라고 환호하고 있다.

가만, 특유의 연기톤이라고? 단언하기 전에 잠시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요원을 늘 건조하고 차분하며 우울한 한가지 톤으로만 일관해온 사람처럼 기억하지만, 의외로 그가 보여준 연기의 스펙트럼은 그리 좁지만은 않다. 에스비에스 드라마 <49일>(2011)에서 이요원은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정물처럼 살아가는 여자 송이경과, 그런 송이경에게 빙의된 철없는 소녀 신지현, 신지현 덕분에 점차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송이경의 현재까지 다채로운 색깔의 인물을 한 작품 안에서 보여준 바 있다. <문화방송>(MBC) 드라마 <마의>(2012)는 또 어땠나. 극이 진행되며 캐릭터가 기능적인 인물로 전락하기 전, 이요원은 당차고 발랄한 의녀 강지녕 역을 맡아 조승우와 함께 사극에서는 보기 어렵던 ‘스크루볼 코미디’(로맨틱 코미디의 한 종류)를 선보였다. 극 자체가 흥행이나 비평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잊혀지기엔 아쉬운 연기였다.

사람들은 왜 이요원의 연기톤을 단조롭다고 기억할까. 굳이 추측해본다면 두가지 정도의 가설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이요원이 건조하고 차분한 연기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일 테고, 둘째는 감정을 격렬하게 폭발시키는 연기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한국 특유의 정서일 것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이미지만으로 한 배우의 연기 폭을 모두 정의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모든 배우가 터져나오는 파토스를 주체하지 못하는 톤을 선보인다면 그것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보다 아래로 차분하게 깔리는 우울함을 그려내는 데 더 큰 재능을 지닌 배우라면, 그에 합당한 평가가 뒤따라야 하리라.

이요원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작품은 이금림 각본, 표민수 연출의 <한국방송>(KBS) 드라마 <푸른 안개>(2001)였다. 처가 덕에 탄탄한 미래를 보장받은 중년의 유부남 윤성재(이경영)가 자신의 딸뻘인 여대생 이신우(이요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푸른 안개>는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던 작품이다.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부터 위험한 사랑에 흔들리는 모습, 점차 빛을 잃고 고뇌하는 모습까지, 연기 경력도 짧은 스물두살의 배우가 소화하기에 신우라는 역이 요구하는 스펙트럼은 무척 넓었다. 이경영, 김미숙과 같은 관록의 선배들 사이에서 본전만 챙기기도 바빴을 작품에서, 이요원은 예전에 성재와 함께 걷던 길 위에 잠시 머물며 추억을 곱씹는 신우의 쓸쓸한 마지막 장면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좋은 작품이라도 지나치게 우울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적잖은 배우들이 전작에서 받은 영향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밝은 작품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요원은 그러지 않았다. 같은 해 개봉한 차기작 <고양이를 부탁해>는 스무살의 막막하고 축축한 공기를 담아낸 영화였다. 극 전면에 부각된 배두나와 옥지영에 견줘 이요원이 화면에 남긴 인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스무살이 되어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속물적이며 가장 성공지향적인 인물 혜주(이요원)는 조금은 덜 매력적이었으니까. 하지만 혜주는 덜 매력적일지언정 현실의 무게를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기도 했다. 증권사에 입사해 ‘저부가가치 인간이 될 순 없다’고 부르짖으며 성공을 꿈꿨으나, 결국 커피 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서서히 지쳐가는 혜주의 서늘한 쓸쓸함은 관객의 뇌리에 오래 남았다.

연기 초년의 이런 선택들은 그의 이미지를 우울하고 차분한 이미지로 굳혔다. 정작 결혼한 뒤에는 <광식이 동생 광태>(2005), <못된 사랑>(한국방송·2007) 같은 멜로 작품을 찍기도 했고, <외과의사 봉달희>(에스비에스·2007)처럼 전문직 드라마 안에 트렌디 멜로를 섞은 작품도 찍었지만, 그의 이미지를 바꿀 만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요원은 그 순간 자신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작품에 매진했지, 자신의 부진을 씻기 위해서나 흥행을 노리고 의도적인 작품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그 선택들이 옳았다 틀렸다 말할 수는 없다. 2011년, 드라마 <49일>이 끝난 뒤 한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이요원은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20대 초반에는 희한하게 트렌디 드라마가 그렇게 싫었다. 자꾸 정극만 쫓아갔다. 선배님들과 작품을 같이 하고 싶었고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배우고 싶었지, 고만고만한 애들이 나와서 예쁘게 사랑하는 게 별로 당기지 않았다.” 이요원은 동시대 동료 배우와는 다소 다른 목표를 향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갔고, 하여 이요원을 같은 카테고리에 넣고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요원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작품은 역시 대표작 <선덕여왕>(문화방송·2009)일 것이다. 발랄하고 천방지축이던 낭도 시절도 잠시,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타고난 운명을 자각하고는 미실(고현정) 일파가 지배하고 있는 신라를 되찾아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 대장정을 시작하는 덕만(이요원)은 제 감정을 최대한 억눌러야 하는 역이었다. 신라를 지배하는 실권자 미실에게 맞서되 동시에 그에게서 배워야 하는 덕만 역은 주연임에도 쉽게 주목받기는 어려웠다. 극 전체가 미실의 계책과 그에 대항하는 덕만의 성장을 반복하는 구조였고, 실질적인 주인공이나 다름없던 미실이 극에서 퇴장하는 순간 극 또한 동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선덕여왕>을 단순히 고현정에게 주연인 이요원이 밀린 드라마로 기억하기엔, 이요원이 보여준 연기의 섬세함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이요원은 대의를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가며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의 고독과,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고도 여인으로서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군주의 쓸쓸함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것은 권력자로서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의 힘과 범부로서의 소박한 행복을 동시에 지닐 수는 없다는 권력의 딜레마에 대한 섬세한 스터디였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은 오늘날 <황금의 제국>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행복한 가족을 지키고 싶었으나 결국 자기 손으로 가족들을 쳐내야 하는 비정한 권력자에 대한 냉철하고 정제된 묘사는 분명 동시대 동년배의 여배우 중 이요원만이 가능한 종류의 연기다.

어느 순간 좋은 작품을 만나 연기가 확 느는 배우도 있고, 캐릭터와의 상성을 잘 찾아 갑자기 연기가 도드라져 보이는 배우도 있다. 이요원은 아마 둘 중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데뷔 16년차, 조바심 내거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일 없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지치지 않고 해온 사람이 거둘 수 있는 작은 성취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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