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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2 18:50 수정 : 2015.10.23 14:28

영화 <해무>에서 이희준은 똬리를 튼 뱀 같은 모습의 창욱을 연기하며 인간의 바닥을 드러내어 보였다. 이희준의 연기는 늘 보는 이로 하여금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게 한다. 영화사 뉴(NEW)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이 남자 참 착하다. 제이티비시(JTBC) <유나의 거리>(2014)의 주인공 창만(이희준)은 인간의 선의에 대한 강철 같은 믿음을 지닌 청년이다. 그 ‘주변’이라는 게 소매치기, 꽃뱀, 전직 조폭, 사고뭉치 백수건달, 콜라텍 아르바이트생, 인력시장에서 공치고 돌아오기 일쑤인 페인트공, 전직 비리 형사 등 아무리 봐도 쉽게 정 주기 어려운 인물 군상일지라도 그의 믿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선뜻 상종의 의지가 서지 않는 이 이웃들 틈에서, 창만은 매번 웃고 긍정하며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 올곧고 반듯한 심성으로, 창만은 외로운 문간방 장노인(정종준)의 말벗이 되어주고, 가족의 외면 속에 옥살이로 벌금형을 대신하려 하는 계팔(조희봉)을 구해주었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 유나(김옥빈)가 소매치기인 걸 알고서도 “어떻게든 소매치기 그만두게 만든다”고 다짐하며 옆을 지킨다. 그의 존재로 그의 이웃들은 조금씩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고, 볕 들 날 없을 것 같던 가난한 연립주택 식구들의 삶에도 웃을 일들이 늘어난다.

‘유나의 거리’ 착한 청년 역 이희준
‘해무’에선 성욕의 화신 배역 맞춰
여수 입말 익히려 여수 찾고
노숙인 틈 끼어 술자리까지
선배 김윤석 극찬 아끼지 않아
“나도 내 안에 뭐 있는지 몰라
같은 캐릭터 또 연기하긴 싫어”

이 남자 참 무섭다. 영화 <해무>(2014) 속 창욱(이희준)은 꼭 똬리를 튼 뱀 같다. 같은 배를 타는 동료 경구(유승목)가 다방 아가씨 손목을 붙잡고 선실로 들어오자, 2층 침대에 누워 있던 창욱은 자리를 비켜주는 대신 커튼 뒤에 숨어 밖을 훔쳐보며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다.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성욕. 뱀이 스멀스멀 움직이다 결정적인 순간 한껏 턱을 벌려 먹이를 삼키려 전진하듯, 창욱은 극이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성미를 드러내며 빠르게 극단으로 치닫는다. 선원 모두가 흥분과 광기에 젖은 얼굴을 자욱한 안개 속에 감추고 있던 순간, 기관실에 숨어 있던 밀입국자 홍매(한예리)를 발견한 창욱은 희번덕이는 눈으로 핏대 높여 외친다. “그 가시내 죽이지 말어! 나 아직 못했어! 나 해야 해! 지들끼리만 다 하고, 나만 빼놓고!” 급기야 머리 대신 광기와 다리 사이 가득한 욕망을 동력으로 피아 구분을 하기에 이른 창욱은 허기진 목소리로 인간의 바닥을 드러내어 보인다.

이 남자 참 낯익다. 날개만 없을 뿐 천사 같은 사내 창만은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인물이 이희준의 몸을 거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웃을 때면 한껏 구겨지는 얼굴, 말씨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대구 사투리, 싸구려 양복을 입고서도 좋다고 헤헤거리는 실없는 모습까지, 창만은 분명 종로 어느 골목에선가 한번쯤 어깨를 부딪혀 보았을 것만 같은 남자다. 흔하진 않은데 낯익기는 <해무>의 창욱도 마찬가지다. 울상을 지으며 신경질적으로 제 욕망을 토로하는 비루함, 배에 올라타는 밀입국자들을 보며 개중 여자가 있는지 살펴보는 눈알의 움직임, 그리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듯한 천연덕스러움까지. 평생을 서울에서 산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수 출신 관객들의 말에 따르면 여수 방언 또한 원어민 수준에 가깝게 구사한단다. 세상에 저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아랫도리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가도, 이희준이 연기한 창욱을 보면 한명쯤은 있을 법하다는 단단한 확신이 선다.

호와 오의 양극에 서 있는 두 인물을 모두 제 몸처럼 구현해낸 괴물 배우.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매번 생동감 있게 그려낸 탓에, 이희준은 유독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는 실제 당신과 얼마나 닮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하긴, 그나마도 한국방송(KBS) <드라마 스페셜>(2011) 연작들과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으로 얼굴을 널리 알렸으니 망정이지, 그가 아직 낯선 얼굴이던 시절 형사나 사이코패스 등의 배역으로 그를 접한 관객들은 ‘어디서 현업을 뛰고 있는 사람을 섭외해 데려온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에 시달려야 했다. 배우의 그것이라고 믿기엔 지나치게 투박한 대구 사투리, 오밀조밀하고 균형 잡힌 외모가 사랑받는 시대를 역행이라도 하듯 눈도 코도 입도 광대뼈도 모두 큼직한 외모, 멋있게 폼을 잡는 게 아니라 허허실실 어딘가 긴장이 풀린 듯한 자세까지, 이희준은 그동안 우리가 쉽게 접해오던 또래 배우들과는 분명 생김새부터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네 백수 총각이라고 우기면 그렇게 보이고, 형사라고 우기면 또 그렇게 보일 법한, 잘생겼지만 어쩐지 동네에 한두명씩 있을 것만 같은 친근한 외모.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로 이희준을 만난 영화감독 김성수는 2007년 <씨네21>의 특집기사에서 이희준에 대해 “기존 배우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목소리, 표정, 마스크”라고 평가한 바 있다. 물론 김성수는 그의 연기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연기하는 패턴도 그렇고, 굉장히 다르다. 그 특이함이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영화과 교수 몇몇이 그 친구를 아주 좋아한다.”

굉장히 다른, 연기하는 패턴. 그건 아마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조윤희는 이희준의 애드리브와 대사 변주 때문에 촬영 초반에는 적잖이 당황했노라 고백한 바 있다. 주어진 대사를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매 테이크 정확하게 연기하도록 훈련받은 정통 텔레비전 연기자 조윤희로서는, 자신의 입말에 맞게 대사를 조금씩 고치기도 하고 때로는 전체 상황 안에서 자유롭게 변주를 꾀하는 이희준의 연기가 낯설었던 것이다. 정작 이희준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해도 정확한 연기를 구사하며 받아내는 조윤희를 보며 깜짝 놀랐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능청맞은 그의 연기는 얼핏 타고난 재능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희준은 자신을 “철저히 노력형”이라 규정한다. 발음이 좋아진다고 해서 하루 종일 젓가락을 물고 지내다 입 주변이 죄다 헐었다던 배우 초년병 시절의 일화에서도 그의 집요한 노력을 엿볼 수 있지만, 백미는 역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관찰하고 관찰하고 또 관찰하는 모습이다. ‘노숙자 출신’이란 설정이 붙은 <해무>의 창욱을 준비하며, 이희준은 노숙자들 틈바구니에 섞여 함께 술을 마시는가 하면, 여수 입말을 익히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여수를 찾아 현지인들의 말을 배웠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몇 차례 개인기로 선보인 적 있던 표범 흉내 또한 ‘분장 없이 인간의 몸으로만 표범을 표현해 낼 수 있을지’ 하는 궁금함에 하염없이 표범을 지켜보고 흉내 내던 학생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기존에 해봤던 캐릭터를 다시 연기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그의 성향이 더해지면, 비슷한 배역을 맡아도 어떻게든 새로운 요소를 찾아 인물에 부여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관찰하는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집요하게 연구한 결과물들을 이희준은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소화시킨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즉흥적으로 변주하며 인물에 빈틈을 넣는다. 완벽하고 빈틈없는 캐릭터에 흥미를 못 느낀다는 이희준의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게 한다. 이를테면 영화 <환상 속의 그대>(2013) 초반 간호조무사 혁근(이희준)의 근무 장면. 허리 숙여 환자의 휠체어를 수중재활치료 풀장에 넣어주고 일어나며, 혁근은 엉덩이 사이에 끼인 속옷을 손으로 잡아 빼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엉거주춤 걸어간다. 그 자체로는 없어도 상관없을 이런 소소한 디테일들로, 이희준은 혁근이라는 인물에 살을 붙이고 피를 돌린다. 혁근은 평소에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연인을 잃고 난 뒤 혁근의 삶은 얼마나 권태롭고 황량한 것이 되었는지를, 이희준은 사소한 손놀림과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담아낸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그러니까 이희준에게 “실제 당신은 배역과 얼마나 닮았느냐”고 묻는 것은 어쩌면 다소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관찰과 연구의 시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대사가 온전히 자신의 입말에 실려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연기. 이희준은 인물을 ‘연기’한다기보단 온전히 그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어봐도 “사실은 나도 내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까마득한 선배 김윤석으로부터 “(영화계의) 차기 대권주자”라는 극찬을 들은 이희준의 나이는 올해 겨우 서른여섯. 아직 연기할 날들이 쇠털같이 많이 남은 이 남자, 참, 매력적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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