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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26 19:17 수정 : 2015.10.23 14:27

가수 윤상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왜 사람들은 좀처럼 윤상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말을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윤상 노래 잘 만들죠.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새삼스레.” 물론 그렇다. 1988년 스물한살의 나이로 당대 최고의 가수 김현식에게 ‘여름밤의 꿈’을 준 이래 26년간, 윤상이 음악을 잘 만든다는 명제는 좀처럼 부정된 적이 없었다. 몇 차례 제기된 표절 시비를 자신의 기발표 곡들을 직접 월드뮤직풍으로 편곡해 음악적 뿌리를 증명한 리메이크 앨범 <레나시미엔토>(Renacimiento·1996)로 벗어던진 이후로는 끊임없는 상찬의 연속이었으니까. 하지만 ‘뭘 어떻게 잘 만드느냐’를 꼼꼼히 따지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다소 복잡해진다. 노래를 잘 만든다는 표현은 실로 여러 가지를 의미하지 않나.

세상에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쓰는 데 능한 작곡가가 있고, 박자를 조밀하게 쪼개는 데 능한 작곡가가 있고, 기억에 남는 후렴을 만드는 데 능한 작곡가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작곡가들은 ‘노래를 잘 만드는 작곡가’라는 표현으로 수렴할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윤상은 어떤 종류의 작곡가인 걸까? 어느 한가지 특징으로만 정의 내리긴 쉽지 않다. 윤상은 각종 이펙트로 사운드에 질감을 부여하고, 각 악기들의 소리를 주파수 단위로 조절해 노래에 공간감을 쌓아 올리며, 어느 한구석 물샐틈없이 조밀하게 효과음과 리듬 패턴을 채워 넣어 구조적으로 탄탄한 곡을 완성하는 데 집요하게 매달린다. 그렇게 반주가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그 위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얹는 특유의 작법을 생각하면, 윤상은 ‘노래를 잘 만드는 작곡가’라기보단 차라리 ‘사운드 깎는 장인’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은 일단 프로그래밍 음악입니다. 시퀀서를 가지고 자기가 마음에 들 때까지 편집하고 프로그래밍을 하는 거죠. 음악 프로듀서들에게는 이런 신시사이저나 시퀀서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과정은 일반 연주자들이 좋은 연주를 하게끔 유도하는 음악과는 작업 자체가 다릅니다. 음악을 만들면서 스스로 듣고 만족할 때까지 편집할 수 있다는 거죠. (중략) 그런 면에서 전자악기는 어떻게 보면 음악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 수도 있겠죠. 마치 조각가가 혼자 조각을 하듯이 물리적으론 사람을 고립시키면서 그 사람의 색깔이 전부 배어 나올 수 있고.”(현대카드 슈퍼콘서트 공식 블로그. ‘인터뷰’ 윤상, “크라프트베르크, 마침내 세계 정복을 이룬 듯” 중)

윤상이 전자음악의 아버지 크라프트베르크에 대해 남긴 설명은, 아마 방향을 뒤집어 고스란히 윤상에게 돌려줘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기념사진’(1998)의 신시사이저 솔로 부분의 사운드 공간감을 최대한 멀리 빼기 위해 소리 파형을 거꾸로 뒤집어 역상 효과를 노렸다거나, 치밀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희열이 그 비결을 알아내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는 일화는 윤상이 얼마나 집착적으로 사운드에 매달리는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만족할 때까지’ 소리를 만지느라 ‘물리적으로 고립’되어 ‘고독하게’ 작업을 한 여파로, 그는 수면제나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곤두선 신경을 달래고 잠을 청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면 뭐하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윤상이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도달하고 싶었던 사운드의 완성도보다는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병명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당장 뉴스로 가공해 팔기엔 후자 쪽이 더 용이하다는 업계의 생리를 알면서도, 뭔가 앞뒤가 뒤바뀐 것 같다는 쓸쓸함은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음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세밀하게 따져가며 듣는 건 호사취미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윤상과 이스트4A(East4A)가 작곡한 레인보우 블랙의 ‘차차’(2014)를 논할 때, 가터벨트나 채찍 같은 무대의상 대신 과감한 베이스 전개나 신시사이저의 틈을 조밀하게 채워주는 기타 리프, 매끈하게 빠진 브라스 편곡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면 음악 전문 리뷰 매체를 찾아야 한다. 소리에 리버브(반사음 효과)를 걸거나 미세한 딜레이(지연)를 걸어 소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 그를 통해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윤상 특유의 작법이라거나, 데뷔 앨범에 수록된 ‘행복을 기다리며’(1990) 전주 부분을 가득 채우는 비트에 쓰인 효과음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됐는지에 대해 논하다 보면 오타쿠 취급을 받기에 십상이다.

구조적으로 탄탄한 곡 완성 위해
주파수 단위로 소리 조절하는
윤상은 사운드를 깎는 장인이다

하지만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음악을 세밀히 따져듣는 일은
언젠가부터 호사취미 취급받고
너무 많은 문화콘텐츠 속에서
하나를 깊이 음미할 여유 줄어

우직하게 고통스런 작업 고집한
그의 음악 주의 깊게 듣는 건
세상이 강요하는 속도대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아마 음악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 콘텐츠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번거로워한다. <타짜-신의 손>(2014)에 대해 “개별 컷 단위는 현란하게 잘 찍혔지만, 전체 플롯을 놓고 보면 흐름이 덜컹대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거나, 문화방송(MBC) <우리들의 일밤> ‘진짜 사나이’에 대해 “한국 군대가 가진 모순이나 한계를 애써 은폐하고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지점이 찜찜하다”고 말하면, “재미있으면 된 거 아니냐”는 요지의 반응을 접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노래를 잘 만든다’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듯 ‘재미’라는 단어 또한 여러 가지 층위의 가치를 담고 있지만, 그것을 뭉뚱그리고 끝내지 말고 좀더 천천히 음미해보자는 제안은 쉽게 무시된다.

“대중문화 소비자들이 게을러진 탓”이라는 케케묵은 훈장질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슬픈 얘기지만 너무 많은 정보와 콘텐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시대가 아닌가. 안 그래도 여가를 즐길 틈도 없이 일할 것을 요구하는 세상인데, 무언가 한가지를 깊이 음미할 시간적 여유는 점점 줄어든다.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 콘텐츠들이 어떤 과정과 노력을 통해 우리에게 도착하는지 곰곰이 곱씹어보고 그 가치를 온전히 느낄 기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 시대의 여명기만 하더라도 빠른 속도가 우리의 일을 줄여주고 더 많은 여가시간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들 낙관했지만, 웬걸, 세상은 속도가 빨라졌으니 그만큼 더 바삐 움직이라고 우리의 등을 떠민다. 빠른 시간 안에 감상을 끝내고 다음 정보를 받아야 하니, 당장 눈과 귀에 들어오는 즉물적인 요소들만 주마간산 식으로 훑고 넘어가게 된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들 또한 이런 대접을 받는 마당에, 평범한 우리의 노동이라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내가 받아야 하는 서비스’를 보느라 ‘종일 계산대 뒤에 서서 일하는 동료 시민’을 보는 것을 놓치고, ‘저렴한 옷’을 사느라 ‘과중한 작업량에 혹사당하는 공장 노동자’를 생각하는 걸 까먹는다. 그걸 다 고려하며 살기엔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바쁘고 고단하니까. 바쁘고 고단한 탓에 서로가 서로의 괴로움을 오래 바라보지 못하니, 딱 그만큼 우리는 또 외로워지고 소외된다.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 소비자의 자리에 가서 타인의 노동을 외면하고, 노동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외면당하는 이 악순환.

바로 그런 탓에, 지금 이 순간 윤상의 음악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은 제법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윤상의 팬이 아니어도 좋다. 그가 새로 발표한 디지털 싱글 ‘날 위로하려거든’을 좋아할지 싫어할지는 온전히 당신이 판단할 몫이다. 다만 이 곡이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지, 윤상이 사운드로 빽빽한 층을 쌓아 올려 심해와 같은 먹먹한 공간감을 강조한 의도는 무엇이며, 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지 한 번쯤 생각해 볼 것을 조심스레 제안한다. 언론이 윤상의 음악보단 알코올 의존증이나 페루 여행 뒷이야기 같은 가십을 더 중요한 소식인 것처럼 들이미는 시대이니까, 우리는 더더욱 그가 신곡 ‘날 위로하려거든’에서 어떻게 서글픈 멜로디와 현란한 이디엠(EDM,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 성공했는지, 왜 그렇게 이질적인 조합을 시도했는지를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고작 대중가요’ 한 곡을 더 깊게 음미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서는 것은, 그 자체로 더는 세상이 강요하는 속도대로 살기 위해 서로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타인의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을 궁금해하지 않는 시대에조차 우직하게 고통스러운 작업 방식을 고집해 온 ‘사운드 깎는 장인’ 윤상이라면, 선언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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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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