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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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지금까지의 제 방송 이미지 자체가 ‘열심히 안 하고 대충 하고 화만 내고’ 이러는 거였는데, 사실 뭔가 열심히 해보고 싶은 의욕이 큰 사람이거든요. 사실 대충 해도 별 차이는 없어요.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건) 내 집이니까, 조금의 결함도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연예인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전원주택을 짓는 과정을 그린 에스비에스(SBS) 리얼리티 프로그램 <에코빌리지 즐거운가>에서, 장동민은 군말 없이 우직하게 일한다. 물론 맏형 이재룡과 티격태격한다거나 동생 정겨운에게 구박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평소였다면 버럭버럭 화부터 냈을 상황에도 장동민은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공사에 임한다. 투덜대는 척 헤매고 있는 멤버에게 다가가 슬쩍 도와주고, 지친 멤버는 토닥여주며 구슬땀을 흘리는 장동민이라니. 좀 낯설지 않나. ‘그까이꺼 대충’을 외치던 그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성실한 사람이었던가.
“너 무슨 카드 뽑았는지 알겠다. 범죄자지? 아니, 배신자구나?” 음모와 추리, 연합과 배신이 난무하는 서바이벌 게임쇼 티브이엔(tvN) <더 지니어스: 블랙가넷>에서의 장동민은 <에코빌리지 즐거운가>에서의 장동민과는 또 좀 다르다. 서울대니 카이스트니 하버드니, 전국에 날고 기는 브레인들이 저마다 우승을 노리며 모인 아귀다툼의 복판에서, 장동민은 실실 웃으며 상대를 도발한다. “공부만 할 줄 알았지, 멍청해가지고는.” 게임의 해법을 알고 있다며 분위기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부터, 상황에 맞춰 어조와 자세를 바꿔가며 협상과 배제의 전략을 유연하게 구사하는 순발력까지. 오랜 친구 김정훈이 토끼눈을 뜨고 “너 원래 이렇게 똑똑한 애였냐?”고 물을 때면 나도 덩달아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영민한 사람이었나요.
2004년 한국방송(KBS) 공채 19기로 데뷔한 지 딱 10년, 익숙했던 장동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를 화내고 욕하고 소리지르며 막말하는 특유의 개그 스타일로만 기억하던 사람들은, 그가 <에코빌리지 즐거운가>나 <더 지니어스: 블랙가넷>에서 보여주는 모습들 앞에서 새삼스레 ‘재발견’을 이야기한다. 불같은 성격이야 방송에서나 그렇지 실제 삶조차 그랬겠느냐고? 오랜 친구인 유세윤, 유상무와 함께 진행하는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을 듣다 보면 알 수 있다. 장동민은 평소에도 다분히 그렇게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그간 본 적 없는 성실함이나 순발력, 천재적인 두뇌 플레이 같은 게 힐끔힐끔 비칠 때면 처음 보는 광경에 도리 없이 놀라고 마는 것이다. 그도 나이 먹고 변해가는 걸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똑같은 풍경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일 때가 있으니까. 어쩌면 장동민 또한 옹달샘 트리오라는 익숙한 팀이나 콩트 프로그램처럼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이들과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고 있기에, 그간 안 보이던 부분들이 새삼스레 보이는 건 아닐까?
돌이켜보면 장동민에겐 늘 의외의 면모가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지만 동시에 딱 상대가 불쾌해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찾아 그 아슬아슬한 간격을 절묘하게 유지했고, 사람들이 화내고 소리지르는 자신의 개그 스타일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시기가 올 것이라며 30대 중반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불같은 성격으로 해당 기수의 군기반장 노릇을 하면서도, 소품을 잃어버린 후배를 혼내는 대신 새로 소품을 만들어 쥐여주며 ‘신인 때는 다 그런 것’이라고 위로해줬다. 사람들이 장동민의 괴성이나 광기를 먼저 기억하고, 대학 축제 사회를 보며 불꽃놀이를 가리켜 “지금 여러분의 등록금이 터지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는 기괴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느라 종종 잊어버리지만, 장동민은 어느 한가지 성격이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타입의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상대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재며 본능적으로 적정선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화내고 욕하고 막말하고… ‘그까이꺼 뭐 대충’의 주인공
그에게서 성실함, 순발력
천재적 두뇌플레이 비치자
새삼스레 재발견 외치는 사람들 돌이켜보니 그에겐 늘 의외의 면모
막말의 수위 절묘하게 유지하고
자신이 굽혀야 할때 귀신같이 알아
본능적 균형감각에 대화 되는 사람
욕쟁이 조커로만 쓰기엔 아까워 ‘연예인들이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고 말 일이 아니다.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를 파악하고 적정선을 찾는 것은 대체로 적잖은 훈련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 어떻게든 상대를 웃기겠다는 일념 때문에 넘으면 안 되는 오버의 선을 넘어서고야 마는 연예인 한두 명쯤은 쉽게 떠올려 볼 수 있지 않나. 지인이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겠다며 거짓말을 섞다가 에피소드의 당사자로부터 항의를 받고 급하게 사과를 했던 라디오 디제이라거나, 남자들끼리 있을 때 해도 불편할 법한 농담을 여자 게스트를 불러다 놓고 신나게 떠드는 엠시라거나. 그에 비하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게임 상황에 따라 자기 주장을 펼치다가도 자신이 굽혀야 하는 순간을 귀신같이 알고는 “이건 그냥 개인 의견”이라며 물러서는 <더 지니어스: 블랙가넷> 속 장동민의 능란한 거리 유지는 가히 본능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능. 아마 성장 과정에서 습득된 후천적 본능일 것이다. 한살 무렵 장판 틈에 쌓인 먼지를 하염없이 찍어 먹는 바람에 말리던 부모님이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일화를 들으면 사람들은 웃지만, 고작 돌 지난 아들을 지켜보다가 “얘는 누가 말한다고 제 고집을 꺾을 아이가 아니구나”라는 결론을 내린 부모의 훈육법이 얼마나 독특한지는 쉽게 간과한다. 여느 집이었다면 용돈을 장롱 속에 쌓아놓고 아들로 하여금 필요한 만큼 알아서 꺼내 가게 했다거나, 아들이 집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면 둘이 편하게 대화하라며 자리를 비워준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장동민의 부모는 그가 알아서 제 앞가림을 하도록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장동민에게 스스로 적정선을 찾는 방법을 익히게 해줬다. ‘그까이꺼 대충’이란 유행어로 크게 뜨고 나서 스스로에게 했다는 “대본을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믿고 가자”는 다짐은, 아마도 스스로 적정선을 찾아가는 이 후천적 본능에 대한 믿음이었으리라. 사람을 대하고 방송에 임할 때 발현되는 이 균형감각은, 나아가 그가 삶을 대하는 자세로까지 이어진다. “아니요. 내가 봤을 때 만족이란 단어를 쓰는 건 다 거짓이야. 사람에게는 늘 공허한 게 있어요. 매일 쇼핑하고 술 먹고 돈 쓰면 소원이 없겠다 할 때도 있었는데 막상 그래 보니 공허했고 지금처럼 일만 할 때도 공허해. 누군 아이 낳고 살아도 공허해. 사람에게 만족이란 게 없어요. 그냥 숨 쉬어지니까 사는 거지.” 사람에게 만족이란 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장동민은, 같은 인터뷰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것에서 소소한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소박한 인생도 이야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소처럼 우직하게 일해야 한다며. 만족을 모르는 삶의 본질적인 공허함과 돈이 가져다주는 행복이라는 두가지 모순을 모두 긍정하면서, 그 양극단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연스레 그 중간 지점에서 균형을 잡는 삶의 태도. 이쯤 되면 ‘그까이꺼 대충’이란 유행어조차 모든 일을 대강 처리하겠다는 태업의 선언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적당한 지점을 찾아내는 균형감각에 대한 이야기로 들릴 지경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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