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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9 20:57 수정 : 2015.10.23 14:25

문화방송(MBC)의 연말 시상식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언제부터인가 문화방송(MBC)의 연말 시상식에, 특히 연기대상에 관심을 가지는 게 허망한 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제 식구 챙기기’라거나 ‘나눠 먹기’ 때문은 아니다. 어차피 자사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심사하고 평가하는 상에 ‘제 식구 챙기기’라고 손가락질하는 건 민망한 일 아닌가. 그 꼴이 보기 싫으면 백상예술대상이나 한국방송대상처럼 방송사 간 문턱 없이 경쟁하는 권위 있는 시상식을 보면 된다. 나눠 먹기? 단순히 상을 많이 주는 거로만 치면 뉴스타상이나 10대 스타상같이 무대 위로 수상자만 열 몇 명씩 올리는 상을 유지하는 에스비에스(SBS) 연기대상을 따라가기 어렵다. 유독 문화방송을 콕 집어 관심이 시들해졌다고 말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 나눠 먹기나 제 식구 챙기기에서조차 최소한의 일관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시상식이 똑같은 기준으로 상을 주지는 않는다. 어떤 시상식은 상업적 성공을 크게 쳐주기도 하고, 어떤 시상식은 예술적 성취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시상식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판단 기준은 다르기 마련이고, 그런 특징은 해를 거듭해 일관성 있게 이어지면서 그 상의 경향이, 나아가 정체성이 된다. 골든글로브에서 상을 받은 작품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외면당하기도 하고, 청룡영화상이 사랑했던 영화가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는 언급조차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같은 시상식이면서도 해마다 수상작 선정 기준이 들쭉날쭉하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대체 이 시상식을 왜 유지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과 <에덴의 동쪽>의 송승헌은 같은 기준으로 심사했다면 도저히 공동 수상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2008년 문화방송은 두 사람 모두에게 대상을 줬다. 좀 찜찜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높은 시청률, 연기, 인지도 등으로 자사의 광고 매출이나 이미지 상승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가로 평가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불과 4년 뒤인 2012년엔 방영을 시작한 지 불과 두달밖에 안 된 대하사극 <마의>의 조승우(사진)에게 대상을 주느라, 사상 최장 기간 파업에도 정상 방영을 하며 평균 시청률 20%대를 유지한 그해 최고의 효자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주연 안재욱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티브이 출연은 좀처럼 안 하던 조승우가 처음으로 선택한 곳이 자사 드라마였다는 사실에 감사 표시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조승우마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재욱에게 미안하단 수상 소감을 남길 정도였으니 지켜보는 이들이 쉽게 납득할 리 없었다.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상의 가짓수와 종류 또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한다. 대상과 남녀 최우수상, 우수상, 신인상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 연기상의 가짓수는 자꾸만 늘어나 나중에는 미니시리즈와 일일연속극, 특별기획 부문으로 세분됐다. 여기까지야 한국방송(KBS) 연기대상도 그렇게 나눈 바 있기도 하고, 낮 시간 프로그램과 심야 프라임타임 프로그램의 시상을 아예 따로 나눠서 개최하는 미국 에미상도 있으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마저도 해마다 기준이 바뀐다. 문화방송은 2008년 기존에 있던 연기상에 덧붙여 ‘황금연기상’이라는 분야를 따로 만들었는데, 분야 신설 6년 동안 이 상의 세부 분류만 몇 차례 바꾸었는지 모른다. ‘미니시리즈-연속극-조연-중견연기자’ 부문으로 상을 주다가, 미니시리즈 부문을 없애고 ‘연속극-조연-중견연기자’ 부문으로 상을 주는 것으로 바꿨는가 하면, 다시 중견연기자로만 그 대상을 한정해 ‘연속극-미니시리즈’ 부문으로 나눴다가, 이듬해부터는 그냥 중견연기자를 대상으로 통합 시상을 하기 이르렀다. 평균 2년에 한 차례꼴로 수상자 선정 세부 분류만 세 차례가 바뀌는 이 카오스 같은 분야. 게다가 이 분야가 기존 ‘대상-최우수상-우수상-신인상’ 등의 기존 경쟁 부문과 왜 별개로 운영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가는 설명을 들은 기억도 없다.

문화방송 연말 시상식에
더는 실망할 거리도 없다고
확신했을 무렵
그 생각을 산산이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상에서 공동 수상자가 나오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시청자 문자투표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2012년 반짝 생겼다가 이듬해 사라진 한해살이 상 ‘한류스타상’이나, 6년가량 존속하다가 사라진 ‘가족상’ 같은 걸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상의 모양새는 점점 우스워진다. 물론 미디어 격변기이고 산업은 점점 다변화되니, 새로운 상이 신설되고 선정 기준이 조금씩 바뀌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도 새로운 부문의 상이 신설되는 이유나 기존에 있던 상이 없어지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시상 부문의 유지, 확장, 폐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없는 상에 권위가 제대로 실릴 리가 없다.

2011년 상의 이름 자체를 ‘드라마대상’으로 바꾸고 대상을 배우가 아닌 작품에 수여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꿨다가, 반응이 안 좋자 이듬해 다시 배우에게 대상을 주는 것으로 선회한 대목쯤 이르면 그냥 모든 기대를 내려놓게 된다. 배우에게 상을 주는 연기대상인지 작품에 관여한 모든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대상인지, 주최 쪽이 시상식의 정체성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는데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 상황이 이러니, 문화방송 연말 시상식에 관심을 가지는 일 자체가 허망한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모든 기대와 관심을 다 내려놓았으니 더는 실망할 거리도 없다고 확신했을 무렵, 그 생각을 산산이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18일 <한겨레> 기사 ‘연말 시상식 올해는 달라지나’에서 전해진 바처럼, 문화방송은 올해 연기대상과 방송연예대상의 대상 수상자를 모두 100% 시청자 문자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대상에서 공동 수상자가 나오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시청자 문자투표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그게 인기투표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드라마 평론가, 시청자 위원회 위원, 탤런트 협회 관계자, 촬영감독 연합회 관계자, 피디 연합회 관계자, 대중문화 전문 교수 등으로 구성된 심사자문위원단의 회의를 거쳐 후보를 뽑는다”고 답한다. 누가 상을 받아도 이견이 없을 만한 후보군을 뽑아놓고, 그 안에서 대상을 가리는 것만 시청자들 손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뽑은 후보, 누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후보군, 시청자들의 선택. 글쎄, 내 귀에는 그게 꼭 엠넷(Mnet)의 <슈퍼스타 케이>나 에스비에스의 <케이팝 스타>와 같은 서바이벌 오디션 쇼에서 반복적으로 들었던 이야기와 꼭 닮아 보인다. 심사위원들이 뽑아서 생방송에 올린 후보들, “지금까지 올라온 참가자들 중엔 누가 우승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수사, 그리고 시청자들이 선택한 단 한 명의 우승자. 그러니까 지금 문화방송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최고를 선정하는 ‘상’을 주는 시상식이 아니라, 연말을 맞아 대국민 오디션을 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슈퍼스타 케이>나 <케이팝 스타>는 심사위원 점수와 시청자 문자투표를 합산하기라도 하지, 문화방송 연말 시상식은 그 정도의 책임감조차 없다.

위기를 한번도 겪지 않는 상은 없다. 세계 3대 영화제라는 베니스, 칸, 베를린 영화제도 모두 조금씩 공정성이나 선정 기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면서, 시대 변화에 맞춰 경쟁 부문을 확대하고 시상 부문을 재조정하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무릇 상의 권위란 가장 중요한 대상 수상자를 직접 세운 기준에 맞춰 선정하고, 그 선정 결과에 대해 주최 쪽이 책임지고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로 선다. 공동 대상 남발로 욕을 먹었다면 단 한명의 대상 수상자를 뽑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된다. 문화방송은 그 책임을 시청자들에게 떠넘겨 상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그것을 ‘공정성 담보’나 ‘시청자 참여 축제의 장’과 같은 그럴싸한 수사로 덮음으로써 정확히 그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모두의 책임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니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2014년은 유달리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던 한 해였다. 반복되는 실망과 환멸에 지친 이들은 “포기하면 편해”를 농담조로 중얼거리며 한 해를 보냈다. 그런데 문화방송 연말 시상식 소식을 들으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바닥을 쳤다고 생각하고 포기한 순간, 우리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건 연말 시상식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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