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엔 드라마에서 세월호 사고가 드러낸 상처와 흔적이 관찰됐다. <오만과 편견>에서 한열무(백진희)는 동생의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검사가 되었지만, 압도적인 무력감을 경험하고 만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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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가톨릭이 격변하던 1964년,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가톨릭 학교 교장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젊은 신부 플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경외의 대상이어야 할 신부가 학생들과 너무 무람없이 지내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길게 기르고 다니는 손톱도 불결하다. 게다가 교회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니. 무릇 교회란 변함없이 굳건히 서서 흔들리는 신자들을 바로잡는 반석이어야 하지 않는가. 못마땅해하던 차 한 젊은 수녀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플린 신부가 학교 최초의 흑인 학생인 도널드를 지나치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도널드를 성추행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반감을 먹이 삼은 의심은 이내 확신이 된다. 거짓으로 증거를 꾸며내 플린 신부로 하여금 스스로 학교를 떠나게 만든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모든 것이 끝난 뒤 갑자기 울먹이며 고백한다. 의심이 든다고. 내가 정말 제대로 된 판단을 한 건지.
2004년 맨해튼 시어터 클럽에서 초연된 <다우트>(의심)란 제목의 이 연극은 2005년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퓰리처상, 뉴욕드라마비평가협회상, 토니상을 휩쓸었다. 신부의 행실을 의심하고 그 의심을 확신하지만 끝내는 자신의 확신조차 신뢰할 수 없는 끝없는 회의의 구렁텅이. 작가 존 패트릭 섄리는 이 작품을 9·11 테러와 그 뒤를 이은 이라크 전쟁을 보며 구상했다고 한다. 뉴욕은 언제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세계의 수도’로 남을 것이라던 안온한 확신의 세계는 2001년 9월11일 이후 사라지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피아 구분을 하며 적을 찾아내는 시대가 개막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을 거라는 증거는 무수히 쏟아져 나왔지만, 누구라도 보복해야 했던 부시 행정부와 미국인들은 확신을 가지고 이라크전을 시작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선과 악의 프레임, 의심에서 시작된 피아 구분과 근거 없는 확신은, 9·11 테러가 남긴 트라우마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9·11 테러가 2001년 9월10일까지의 미국과 2001년 9월11일 이후의 미국을 나눴다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참사는 2014년 4월15일까지의 대한민국과 2014년 4월16일 이후의 대한민국을 나눴다. 우리는 수면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던 선미가 이틀에 걸쳐 완전히 가라앉는 동안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도망치는 이들을 실시간으로 목격했고,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날의 비겁은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아주 깊게 각인됐다. 나는 지난 5월3일치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두려워하고 탓을 할 외부인이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는 한국인들은 이제 내부인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중략) 후대의 대중예술가들은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 우리 내부의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이 초라한 시대를.” 나는 ‘후대의 대중예술가들’이라고 말했지만, 트라우마의 흔적은 내 예상보다 빨리 대중문화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SBS ‘비밀의 문’MBC ‘오만과 편견’
KBS ‘힐러’ tvN ‘미생’…
작품을 만드는 이들의 무의식
혹은 작품을 보는 이들의 무의식에
세월호의 트라우마는
그렇게 선명히 각인되었다 가장 노골적으로 사건을 언급한 작품은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비밀의 문>이었다. 영조 치하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서, 노론과 소론은 왕릉에서 발견된 의문의 시체를 놓고 수사권 다툼을 벌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자(이제훈)는 분노에 차 일갈한다. “이 사람의 눈엔 그대들 모두가 역도요. 지금 이 시각 우리가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힘없는 백성 하나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겁니다.” 작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건의 뒤를 쫓는 소녀 지담(김유정)을 말려 보라는 이의 충고에, 지담의 아비 서균(권해효)은 이렇게 답한다.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와 그 유족이 안타까워서 진실을 밝혀 보겠다는 게 뭐가 문제야? 문제가 있다면 자식 놈 귀한 뜻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이 못난 애비가 문제고, 진실이나 정의 따위엔 관심조차 없는 이 험한 세상이 문제인 게지.” 문화방송(M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또한 ‘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걸 전제하고 있다. 15년 전 동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음에도 검찰이 서둘러 사건을 덮는 것을 보며, 한열무(백진희)는 검사가 되어 진실을 밝히겠노라 다짐한다. 검찰이 된 열무는 공소시효를 3개월 앞두고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지만, 유력한 진범 용의자는 검찰국장 이종곤(노주현)이다. 그를 묶어둘 만한 증거는 없으며, 상부의 지시로 팀은 해체 위기에 놓인다. 분노에 차 국장실에 쳐들어가 사건의 진실을 따져 묻는 열무에게 이 국장은 “심정은 알겠는데 이러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열무는 싸늘하게 되묻는다. “무슨 심정을 이해하시는데요? 차가운 공장 바닥에서 반쯤 불타 죽은 동생을 본 심정이요? 자식 그렇게 보내고 세상 반쯤 놓고 사는 부모를 본 심정이요? 이렇게 눈앞에 버젓이 있는 범인이 빽으로 힘으로 빠져나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다 겪는 심정이요?” 조사 대상이 되어야 할 이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상대가 너무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조사할 수 없는 이 압도적인 무력함. <오만과 편견>은 제 흠을 감출 때만큼은 놀랄 정도로 유능해지는 국가 권력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다. 언론은 어떨까? 송지나 작가의 최신작인 한국방송(KBS) <힐러>에서, 한때 민주주의를 목 놓아 부르며 해적방송을 하던 젊은이는, 자신의 과거를 매끄럽게 배신할 수 있을 만큼 노회해진 거대 신문사의 사주가 되었다. 대기업 노조의 파업 탓에 경제에 위기가 왔노라 사설을 내겠다며 다른 신문사 사주들과 여론 조율 회의를 하는 이 냉혹한 미디어 재벌 김문식은, 열혈 저널리스트인 동생 김문호(유지태)에게 여유있게 웃어 보이며 말한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알지?” 변절자 김문식을 연기하는 배우는 한때 장하림(문화방송 <여명의 눈동자>. 1991)이었으며 강우석(에스비에스 <모래시계>. 1995)이었던, 송지나의 세계 안에서 정의로움 그 자체를 연기하던 배우 박상원이다. 작품 안에서 수양딸을 버리고는 사망으로 조작했다는 혐의마저 사고 있는 김문식을, 가장 정의로운 인물을 연기하던 박상원의 얼굴로 만나는 어떤 섬뜩함. 응당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한 티브이를 가득 메웠다. 티브이엔(tvN) 드라마 <미생>의 오 차장(이성민)에겐 원작엔 없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오 차장은 과거 함께 일했던 계약직 사원 이은지(서윤아)에게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지만, 이은지가 비리 누명을 뒤집어쓴 채 회사를 떠나는 걸 막지 못했다. 퇴사 뒤 이은지가 배달 일을 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기억에 시달리는 오 차장은 무리를 해서라도 장그래(임시완)를 정규직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정작 누명을 씌운 당사자인 최 전무(이경영)는 이은지의 존재조차 망각한 지 오래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고, 책임이 있는 이들은 쉽게 과거를 잊는다. 고통받는 건,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오 차장 같은 이들이다. 오 차장이 퇴사해 세운 회사에 취직한 장그래는 나름의 행복을 찾았지만, 그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원인터내셔널의 시스템을 바꾸는 데는 결국 실패하고, 오 차장이라는 선한 개인의 사적 구제에 기대어 행복을 얻은 결말이? 무능한 공권력에 대한 비판, 부패한 언론에 대한 조소, 권력형 비리를 밝히려는 젊은이들. 세월호 참사 이전에도 이와 같은 소재들을 드라마에서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참사가 일어나고 구조에 실패하며 진실규명이 정쟁의 소재가 되는가 하면 유족들이 공공연하게 모욕당하는 일련의 사태를 겪은 뒤, 드라마 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막을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죽음, 죽었는지 살았는지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한 죽음, 권력이 제 보위를 위해 그 진실을 숨긴 죽음. 작품을 만드는 이들의 무의식 혹은 작품을 보는 이들의 무의식에, 세월호의 트라우마는 그렇게 선명히 각인되었다. 그리고 일상의 반복 속에 세상이 참사의 기억을 지우려 할 때마다 트라우마는 이렇게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볼 것이다. 그것이, 구조에도 실패하고 모욕을 막는 데에도 실패한 초라한 우리 시대가 짊어져야 할 굴레인지도 모른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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