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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23 19:19 수정 : 2015.10.23 14:23

무모함과 고지식함은 지성의 힘있는 연기의 밑바탕이 되어왔고, 지금 그 힘은 드라마를 단단히 떠받친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그 드라마, 시작부터 참 범상치 않았다. 화면 안으로 불쑥, 철제 의자를 바닥에 내려놓는 사람의 손이 들어온다. 뒤이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젊은 사내의 상반신. 철제 의자에 앉으니 이마에서 목까지 화면을 꽉 채운다. 이게 뭔가 싶은 순간, 사내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시청자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건들거리는 말투로 입을 연다.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하루 이틀 얘기는 아냐.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읽어 봤어? 어린애를 끼고 자면 지가 어려지고, 호랑이를 먹으면 지가 용맹스러워지고, 간을 먹으면 간이 좋아지고. 그러니까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게 인류의 원형이라는 건데. 지금은 현대잖아?” 웬 중년 남자를 앉혀놓고 자신에게 필요한 진실을 얻기 위해 협박 중인 이 젊은 사내는, 쉬지도 않고 말을 놀려 상대를 코너로 몰아세운다. “그러니까 무조건, 진실을 얘기하세요.” 온갖 비밀과 음모로 겹겹이 싸인 문화방송(MBC) 드라마 <로열 패밀리>(2011)는 지성의 몸과 말을 빌려 그 포문을 열었다.

조금만 더 과장되게 연기했다간 자칫 우스꽝스러워질 수도 있었을 장면, 지성은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게 딱 좋은 수위의 연기로 힘있게 장면을 책임졌다. 한국 드라마의 뻔한 관습과는 거리가 먼 연극적인 오프닝 신을 지성은 무슨 마음으로 연기했던 걸까. 운 좋게도 나는 <로열 패밀리> 기자 간담회에 기자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고, 지성에게 그 장면을 찍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직접 물어볼 기회를 얻었다. 지성은 이렇게 답했다. “대본을 보고 남자답게 연출부에 이야기했다. 첫 촬영날, 첫 장면으로 넣어달라고. 도전이었는데 나중에 엄청 후회했다. 캐릭터에 더 몰입한 다음에 찍었어야 했는데. 아쉬움은 남지만 가장 영광스럽고 보람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첫 장면 말고도 우리 작품엔 클로즈업이 참 많다.” 모험적인 장면을 제일 먼저 찍어버리겠노라 자청하는 배우, 그러고도 그 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작품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고 말을 돌려버리는 고지식한 배우. 무모한 배짱과 교과서적인 고지식함이 동거하는 대답은 내 흥미를 끌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성은 원래가 그런 배우였다.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무모함과 고지식함은, 사실 뭔가 한 가지에 꽂혀 인생을 바치는 이들에게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덕목이다. 고지식하기에 한눈팔지 않고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무모하기에 쉬 상상하기 어려운 깊이로 몰두한다. 지성 또한 그런 사람이다. 완고한 아버지 몰래 지원한 연극영화과 입시에 실패하자, 지성은 무턱대고 상경해 삼촌의 지인이라는 방송국 피디를 찾아간다. “뭐, 열심히 해봐”라며 심드렁해하는 피디를 붙잡고 방송국 건물에 드나들 수 있게만 해달라고 간청한 지성은, 방송국에 쌓여 있는 드라마 대본을 몰래 훔쳐보고 촬영장을 구경하며 혼자 연기를 연습했다. 이 무모함에 ‘친척 집에서 기숙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오랫동안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는 고지식함이 더해지자, 안 그래도 무모했던 지성의 데뷔담은 여의도 지하철역이나 여의도공원에서 노숙을 하면서 매일 방송국 출근을 했다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점프한다. 에스비에스(SBS) <카이스트>(1999)에 출연하고 싶다는 일념에 다짜고짜 제작사에 전화를 걸어 오디션을 요청해 첫 배역을 따냈다는 대목쯤에 이르면 숫제 거짓말처럼 들릴 지경이다.

‘킬미 힐미’의 논란마저 돌파한
곡예나 다름 없는 1인7역의 연기
무작정 상경…여의도 노숙…
카메라 울렁증과 컴플렉스…
16년을 포기않고 묵묵히 걸어온
지성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을 걸 만한 목표를 발견하면 대책없이 몰입한다. 데뷔 초 그는 화면에 비친 모습이 다소 뚱뚱해 보인다는 지적에 채소만 먹으며 3주 만에 14㎏을 감량했고,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기 때문에 어깨 너머로 알아서” 연기를 배워야 했다. 물론 “중구난방으로 두서없이 연기”한다는 콤플렉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카메라 울렁증도 생각처럼 잘 고쳐지지 않아서, 에스비에스 <화려한 시절>(2001)을 찍을 때까지도 지성은 혼자 화장실에 가서 울곤 했다. 데뷔 3년차가 되어 주연을 맡아도 여전히 카메라 울렁증을 앓는다면 낙담할 법도 하지만, 지성은 십 년 뒤를 보며 그 시절을 견뎠다. 2012년 잡지 <얼루어>와 한 인터뷰에서 지성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런 작품, 저런 작품을 하는 걸 보고 도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못 하는 걸 찾아 공부하는 중이에요. 공부하다 보면 십년 뒤에 제가 갖고 있는 주머니는 정말 많아질 거고, 그 주머니 속에서 연기를 하면 어떤 배우든 다 이길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고, 롱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에 몰두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지성 또한 삶의 다른 중요한 결정들보다 연기가 앞서는 일이 잦았다. 영화 <나의 피에스(PS) 파트너>(2012)에 지성과 함께 출연한 후배 배우 강경준은 개봉 당시 한 토크쇼에서 지성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서먹함을 깨고 친해져보려 촬영 대기시간에 말을 걸었는데, 대화 주제가 연기로 넘어가자 지성이 갑자기 1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연기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당황했다는 것이다. 본인은 군 복무 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여유’ 있는 정도의 몰입이 남들에겐 아직 당황스러운 수준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성은 에스비에스 <보스를 지켜라>(2011) 촬영을 위해 운동만으로 3주 동안 13㎏을 감량하고, ‘좋은 작품을 놓칠 수 없다’는 이유로 신혼여행을 뒤로 미루고 한국방송(KBS) 드라마 <비밀>(2013)의 출연을 결정하는가 하면, 어렵게 끊은 담배를 영화 <좋은 친구들>(2014) 촬영 당시 친구로 출연한 동료 주지훈, 이광수와 친해지기 위해 다시 피웠다. 한때 ‘가슴 아픈 연기를 하려면 내 가슴에 흠집을 내야 한다’고 여겼을 정도로, 지성은 배역에 자신의 인생을 동기화하는 배우다.

이쯤 되면 수많은 남자배우들이 고사한 것으로 알려진 문화방송 <킬미 힐미>(2015)의 주인공 차도현 역을 최종적으로 수락한 게 지성인 것 또한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주인공 차도현에게는 여섯개의 인격이 더 있다. 소심하고 반듯한 차도현의 반작용으로 탄생한 폭력적인 인격 ‘신세기’는 대사 중에 “오글거린다”는 묘사가 등장할 만큼 유치한 인물이며, 놀기 좋아하는 한량 ‘페리 박’은 ‘찐’한 여수 사투리와 건들거리는 몸짓으로 인물을 표현해야 한다. 최근 방영된 6화에 처음 등장한 인격 ‘안요섭’은 설상가상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열일곱 소년이다.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인격 간의 차별점을 두기 어렵고, 과장해서 표현했다간 주인공이 겪는 고통이 웃음거리로만 소비될 수 있다. 이 곡예나 다름 없는 1인 7역의 연기를, 지성은 과감하게 도전해 끝내 보는 이들을 납득시켰다.

힘있는 연기에는 논란을 돌파하는 힘이 있다. <킬미 힐미>는 제작 단계에선 캐스팅 논란으로 시끄러웠고, 방영에 들어가자 표절 시비를 겪는 중이다. 공교롭게도 경쟁작인 에스비에스 <하이드 지킬, 나>(2015)의 원작은 표절 의혹을 제기한 이충호 작가의 웹툰 <지킬박사는 하이드씨>(2011)이고, 주연은 캐스팅 논란의 주인공이었던 현빈이다. 좋다고만 하기는 어려운 모양새, 그럼에도 <킬미 힐미>가 순항하는 것은 지성의 공이 압도적이다. 물론 이미 한차례 <비밀>을 통해 검증된 황정음과의 연기 호흡이나, 문화방송 <해를 품은 달>(2012)에서 빛을 발한 진수완 작가의 각본 또한 작품을 견인하는 힘이다. 그러나 “못 하는 걸 찾아 공부”해가며 차곡차곡 채워왔다는 주머니에 담긴 것들을 아낌없이 꺼내는 지성이 아니었다면 그 결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흔히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볼 때 사람들은 그 인생이 예측 못할 반전이나 다양한 굴곡, 벼락 같은 한 방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기를 기대하곤 한다. 무모하게 도전하고 고지식하게 한 길만 파면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뻔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 뻔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성은 배우의 꿈을 찾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고, 오랫동안 콤플렉스에 시달렸으며, “한 방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묵묵히 여기까지 걸어왔다. 16년간 간직한 그 무모함과 고지식함이 마침내 빛을 발할 ‘한 방’의 시간이 왔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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