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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06 20:19 수정 : 2015.10.23 14:22

김래원은 제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인간의 어둠을 탐구하면서 20대에 남긴 성적표를 다시 쓰는 데 성공했다. 최성열 <씨네21> 기자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남자는 늘 허기에 시달린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무허가 판자촌에 몸을 붙인 채 넝마주의로 살던 남자는, 건달들의 세계에 들어와 삶에 어느 정도 기름기가 낀 다음에도 두 눈에서 맹목적인 허기를 지우지 못한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것도 언제 사라질지 몰라. 언제 다시 주린 배를 안고 휘청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늘 남자의 등을 떠밀지만, 허기에 쫓긴 남자에게 대단한 계획이나 체계적인 목표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남자의 눈빛은 공허하고, 무엇을 응시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더 서늘하다. 대신 그를 지배하는 건 즉물적인 욕망이다. 순간 “야마가 돌아” 주먹이 먼저 나갔던 것처럼, 남자는 당장의 제 앞가림을 위해 친구의 가족을 죽인다. 캐릭터의 사연을 묻는 김래원에게 “그냥 깡패”라고 이야기했다는 유하 감독의 말처럼, <강남 1970>(2015) 속 건달 백용기는 이성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짐승 같은 남자다.

여기 이 남자는 어떤가. 개천에서 난 용처럼 검찰이 되었고,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었기에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헤쳐온 상관의 사냥개가 되길 자처했다. 간신히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 종양이 들어앉아 있어 살 날이 3개월 남짓 남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다. 다리를 저는 사냥개는 쓰임새가 없으니 잡아먹어야지. 젊은 날 충성을 다 바친 상관은 자신을 들통에 넣어 삶아 먹을 준비를 하고, 남자는 죽어가는 육신을 간신히 지탱한 채 이빨을 간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 인간들은 반드시 내 손으로 파멸시키리라. 피골이 상접해 두개골의 윤곽이 보일 만큼 퀭한 이 남자, 움푹 들어간 눈구멍 속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난다. 에스비에스(SBS) <펀치>(2014~)의 시한부 검사 박정환 과장은 손대면 바스라질 듯 메마른 말투로 복수를 설계한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문화방송·2003)나 <사랑한다 말해줘>(문화방송·2004), 영화 <아이엔지(ing)>(2003) 등 일련의 로맨스물로 김래원을 기억했던 사람들에게, 2015년 연초에 그가 선보인 두 편의 주연작은 제법 인상적인 터닝포인트일 것이다. 한때 송아지 같은 눈매와 서글서글한 말투, 기대기 좋은 듬직한 풍채와 윤기있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스타덤에 올랐던 김래원이 아닌가. 섬세한 감정표현으로 멜로의 결을 살리던 남자가, 스크린 가득 누린내를 풍기며 동물적인 성교를 나누는가 하면, 브라운관 안에선 간결하고 효율적인 복수를 위해 온갖 술수를 펼치는 광경을 보는 건 분명 조금은 낯선 경험일 테니까. 누군가 ‘재발견’이란 표현을 꺼내 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새삼스레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던가”라는 찬사를 던진다. 글쎄, 재발견이란 표현에 동의하느냐와 별개로 한 가지 흥미로운 구석이 있긴 하다. 김래원의 필모그래피에서 범죄 누아르물이나 밑바닥 인생 역할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과, 그 작품들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참 로맨스물을 성공시키던 시절, 김래원은 인터뷰 때마다 연기 욕심을 숨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2003년 <아이엔지>를 개봉하고 <씨네21>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김래원은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특유의 부드럽고 넉살 좋은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기자에게 대놓고 푸념을 늘어놨다. “사람들은 꼭 내가 즐겁고 재미를 주는 것만 바래. 그것만 좋아하고. 내가 아무리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화면에서 가볍게만 풀리니까 뭘 할 수가 없어.” 이제 갓 스타덤에 오른 스물세살의 김래원은,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김래원이기에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배우라면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아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알아보는 이가 드문 지방 인력사무소를 찾아가 일당 잡부 일을 찾았고, 연기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덤볐다던 배우다운 푸념이었다.

20대엔 자신에게서
밝은 모습만 찾는 이들에게
진지한 모습 보여주겠노라
선언했던 그는
더 이상 어두운 역을
맡고 싶지 않다 말한 뒤에야
비로소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었다
마치 어정쩡한 학점을 받은
과목을 재수강해서
기어코 A+ 학점을
따내고야 마는 학생처럼

한국에선 유달리 남자배우가 거친 역을 맡았을 때 비로소 연기력을 인정받는 일이 잦다. 일상의 감정들을 모나지 않게 세밀히 그려내는 감정 연기나 리듬감 있는 코미디 연기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동안,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거칠고 위협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연기만이 진짜 남자배우의 자질인 것인 양 평가되는 현상. <의가형제>(1997·문화방송)나 영화 <연풍연가>(1999)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바 있던 장동건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깡패 같은 형사 역을 맡은 이후에야 간신히 배우로 인정받은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김래원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던 걸까? 한때 “아직은 내 나이에 맞는 연기만 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남자답게 반응하는 건지 모르겠다”던 김래원은, 2005년 <미스터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세편의 범죄물 영화에 출연하며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조직에 의해 경찰로 길러진 남자를 연기한 <미스터 소크라테스>, 새 출발을 하려 했지만 뜻처럼 되지 않던 깡패를 연기한 <해바라기>(2006), 예술품 복원 전문가라는 능력을 범죄에 활용하는 사기꾼으로 등장한 <인사동 스캔들>(2009)까지.

<해바라기>는 흥행에도 성공해 적잖은 남성 팬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이 시기 김래원의 연기나 그가 고른 작품들이 똑 부러지는 찬사를 들은 건 아니었다. <미스터 소크라테스>는 코미디와 누아르의 배합이 어정쩡했다는 평을 들었고, <해바라기>는 흥행과 무관하게 드라마 대신 막판 액션에 방점이 찍혀 배우가 낭비됐다는 게 중론이었다. <인사동 스캔들> 또한 예술계 이면의 다양한 인물 군상을 전시하는 데 급해 인물들의 매력이 드러나지 못했다. 연기 욕심이 많은 배우에게, 일련의 작품들이 거둔 어정쩡한 성과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인물에 녹아들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던 김래원은 <해바라기>를 찍으며 인물에 깊게 몰입할 시간이 없었음을 호소했고, <인사동 스캔들>에선 20대의 나이로 30대의 인물을 연기해야 했던 고충을 토로했다. “나이에 맞는 연기”를 이야기하던 그에게, 썩 잘 맞지 않는 옷들이 연달아 찾아온 것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표를 안고 그는 군대에 다녀왔다. 그렇게 그의 20대가 마무리됐다.

<마이 리틀 히어로>(2013) 개봉 당시 차기작을 묻는 질문에, 김래원은 “무겁고 깊은 삼류 인생의 아픔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설령 어두운 역할을) 하더라도 어두운 부분을 경쾌하고 밝게 풀어갈 수 있는 작품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30대가 되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여유로워진 탓도 있었을 것이고, 같은 연기를 답습하기 싫다던 연기 욕심 많은 배우의 신조도 한몫을 했으리라.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김래원은 삶의 가장 무겁고 가장 어두운 면모를 다룬 작품들로 돌아왔다. <강남 1970>에선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하는 삼류가, <펀치>에선 어둡고 비열한 방식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온 남자가 되어. 공교롭게도 <강남 1970>은 유하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범작에 그친다는 평을 듣고 있고, 박경수 작가의 세번째 단독집필작인 <펀치> 또한 반복되는 패턴으로 인해 매너리즘을 의심받기 시작했지만, 김래원의 연기만큼은 논란을 돌파하는 힘을 발휘한다. 전작의 주인공들이 삼류이거나 인간 말종인 이유가 대체로 개인적인 사연이나 환경 탓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들은 한국의 폭력적인 압축성장 과정이 낳은 부동산 개발사나 사법허무주의와 같은 시대적 맥락으로 충분한 당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20대엔 자신에게서 밝은 모습만을 찾는 이들에게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선언했던 그는, 더 이상 어두운 역을 맡고 싶지 않다고 말한 뒤에야 비로소 제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인간의 어둠을 탐구하는 데 성공했다. 마치 어정쩡한 학점을 받은 과목을 재수강해서 기어코 A+ 학점을 따내고야 마는 학생처럼, 김래원은 20대의 일련의 시도가 남긴 성적표를 다시 쓰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래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이 이후일 것이다. 미완으로 남아 있던 도전을 제대로 매듭짓는 데 성공했으니, 이 욕심 많은 배우가 다음에 세울 목표가 무엇일지 궁금한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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