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원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환호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싶다’는 견결한 보수주의자에 대한 보상이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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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이쪽 글을 쓰는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로 “얼굴에 분칠한 사람들 말을 다 믿어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연예인들이 다 거짓말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래도 이미지 관리가 먹고사는 일과 직결된 이들이니, 마냥 진솔하게 모든 걸 털어놓길 기대해선 안 된다는 뜻이리라.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도 140자짜리 트위트 하나 쓸 때에도 적을 글 안 적을 글 가리느라 솔직한 이야기는 반쯤 포기하는 마당에 하물며 연예인들이야. 그렇다고 이들이 하는 말을 모두 의심하기 시작하면 창작의 이면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다. 결국 전면에 비치는 연예인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그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꾸준히 행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작품관에 대해, 인생관에 대해,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에 대해 정말 말한 대로 살아가는지 말이다. 최근 티브이엔(tvN) <삼시세끼>로 세간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차승원은 어떨까? 사람들은 그가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해체하고 채소를 다듬어 주부 9단들이나 만들어낼 법한 밥상을 차리는 모습에 매료됐다. 어떤 이들은 유해진을 향해 잔소리를 쏟아내면서도 그가 좋아하는 콩자반 반찬을 준비하는 차승원에게서 ‘엄마’의 향기를 느끼기도 한다. 모델 데뷔 27년차, 배우 데뷔 18년차, 차승원을 알 만큼 안다 생각했던 이들은 그렇게 다시 한번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긴, 자막으로 꾸준히 ‘밀항 느낌’이라거나 ‘일 낼 기세’라고 놀려댈 만큼 시커멓게 차려입은, 키 188센티미터의 거구에 수염을 무성하게 기른 차승원이니까. 그런 사람이 입도하기가 무섭게 주방기구들을 자기 키에 맞춰 진열해둔다거나, 핑크색 감자칼을 보고 “누가 봐도 내 거. 남자는 역시 핑크”라고 말하는 광경이 확실히 낯설고 재미있긴 하지. 그렇다면 과연 차승원의 이런 모습은, 그간의 행보와는 다른 ‘변화’인 걸까? 2003년 <한겨레21>을 통해 그를 인터뷰한 배우 오지혜는 그를 ‘대충 마초’라 수식했다. 사춘기를 맞은 아들과는 말이 잘 안 통하며 전형적인 ‘마누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내가 좋다고 말한 그의 가부장적인 말들 때문이었으리라. 이 대목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물론 ‘성역할 고정관념의 전복’이라는 찬사를 들어가며 능숙한 살림 솜씨를 선보이는 차승원 또한 12년 전엔 아내의 ‘전형적인 마누라의 모습’을 좋아한다던 남자였다는 점이다. <삼시세끼>에서 “20대 땐 음식 만드는 게 구차하다고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 그게 근사하고 섹시해”졌다던 그의 말을 믿는다면, 저 인터뷰는 아마 ‘구차함’에서 ‘근사함과 섹시함’으로 이동하는 과정의 중간쯤에 이뤄진 거겠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정해둔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심지
그의 살림 솜씨 또한
‘의외의 여성성’이나
‘마초의 변신’이라기보단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잘해주고 싶다는 태도의
연장인 셈이다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대목은 그 다음에 나온다. “아내와의 사이에 별 대화는 없어도 이미 커다란 신뢰의 강이 흐르고, 게임 중독에 빠진 아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유를 준다.” ‘마초’라 불릴 만큼 보수적인 가정관을 가진 남자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재를 가하는 대신 가족 구성원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태도. 스스로 호불호가 분명하다는 차승원은 ‘내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진 않지만, 일단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내 사람들’에겐 굳은 신뢰를 주고 책임감을 지닌다. 언뜻 가족이기주의나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흔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임지되 군림하거나 자신의 방식을 따르길 요구하기보단 존중하는 태도를 체득한 모습은 단언을 망설이게 만든다. 12년 전 오지혜는 그의 이런 합리성을 긍정하며 ‘철든 마초’라 묘사했지만, 나는 ‘마초’라기보단 차라리 잘 다듬어진 ‘보수주의자’라 부르고 싶다. 흔히 자본주의적 방종과 적자생존, 이윤 추구의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이 ‘보수’를 참칭하는 통에 ‘보수주의’라는 단어의 뜻이 많이 왜곡되긴 했지만, 전통적 의미의 ‘보수주의’는 자기절제나 책임, 쉽게 타협하지 않는 신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보호와 안녕 추구 같은 덕목들을 중시했다. 앞서 인용한 오지혜와의 인터뷰에서 차승원은 흥행이 아니라 ‘말’이 되는 시나리오를 고집하는 자신의 심지가 시간이 갈수록 흐려지진 않을까 걱정했다.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정해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심지. 가치관을 훌쩍 뛰어넘는 모험을 하기보단 그것을 더 잘 지켜내면서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것은 아주 모범적이고 전통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윤리를 중요시하는 삶의 태도는 인터뷰 때마다 발견할 수 있다. <박수 칠 때 떠나라>(2005)의 개봉을 앞둔 시점, 배우로서의 포부를 묻는 <한겨레> 서정민 기자의 질문에 그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직설적으로 내리꽂’았다. “어떤 배우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도덕적으로나 어느 면으로나 잘 살아야 그게 연기의 살이 되고 자양분이 된다.” 인간의 감정을 극한까지 탐험해야 하는 ‘광대’가 지니기엔 다소 따분한 소신처럼 들릴 수 있다. 더군다나 코미디 위주의 커리어에서 <혈의 누>(2005)를 기점으로 스릴러물로 방향을 튼 직후였으니, 그에 대해 어떤 주석을 달고 싶을 법도 했으리라. 그러나 차승원은 배우로서의 도덕률을 자연인으로서의 윤리와 분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것이 별개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사 위주의 시나리오를 고집하던 연기 태도가 서서히 “재미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씨네21> 장영엽 기자 인터뷰·2008)로 바뀌는 동안에도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박수 칠 때 떠나라> 이후 9년이 지난 2014년 <한겨레> 사심(四心) 인터뷰, ‘아버지’ 차승원의 이미지가 굳어져 배역에 제약이 있지 않겠냐는 남지은 기자의 말에 그는 “안 설레면 또 어떤가. 다른 걸로 보여주면 된다”고 답했다. 절제된 생활이 아티스트로서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는 김원철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단호하다. “나는 착한 사람은 아닌데 본능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직업을 안 했으면 모르겠지만, 하고 있으니까 지킬 건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난 지금의 내 삶이 좋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세계에서 20년 넘게 생활한 이가 지키는 소나무 같은 푸르름이라니. 이 모든 게 이미지메이킹이 아닐까 의심을 품어볼 법도 하다. 그러나 그는 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어떤 인간으로 사느냐”에 매달렸고, 그 흔적은 삶의 궤적이 증거한다. 자신이 지켜야 할 세계의 일원이라 여기는 순간 차승원은 굳이 친절을 가장할 필요가 없는 대상인 빌라 경비원까지 살뜰히 지켜내고(<한겨레> 허재현 기자, 2014), 그런 자신을 과시하는 대신 그저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차승원은 그의 가족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연좌제라 해도 좋을 온갖 인신공격성 기사들을 견디면서 대신 사과했으며, “정치사회적인 발언을 피한다”면서도 세월호 참사의 충격으로 온 나라가 상처를 입었을 때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며 여러 연예인이 고사한 <한겨레> 6·4 지방선거 독려 캠페인에 나섰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는 보수주의자의 윤리란 이런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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