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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17 19:02 수정 : 2015.10.23 14:20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언론인으로서 자기 색깔을 구축했던 손석희는 종합편성채널 <제이티비시>로 간 뒤, 조직이 아닌 개인으로 화면 밖에 투사되는 일이 더 잦아졌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년 전 이맘때였다. 평소 내가 칼럼에 누구를 쓰든 간섭하지 않던 당시 토요판 팀장이, 그날만큼은 전화를 걸어 손석희에 대해 써볼 생각이 없느냐는 말을 건넸다. 손석희가 <제이티비시>(JTBC) 보도부문 사장으로 간다는 뉴스가 한참 화제이던 때였으니 일견 당연한 청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쓸 것인가였는데, 아직 그가 보여줄 뉴스가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선 뭐라 단언키 어려웠다. 결국 난 손석희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모두 서술하고, 추후 행보에 대해 원론적인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간신히 마감을 넘겼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가 어떤 뉴스를 들려주느냐에 따라 그가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신뢰도 1위 언론인’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도박으로 치면 꽤 위험한 도박이다. (중략) 물론 이 도박은 선뜻 동의하기도 쉽지 않고, 승률이 높아 보이지도 않는다. 제이티비시의 보도가 전과 달라지지 않는다면 손석희는 ‘제이티비시의 액세서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불명예스럽게 경력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고, 그의 말처럼 ‘정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보도 논조가 거듭난다 해도 여전히 ‘재벌의 언론 소유와 거대 언론의 종편 진출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30년간 쌓아온 자신의 명성과 이미지를 올인한 이 한판 도박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작년 이맘때, 참사가 터졌다. 세월호 참사 속보를 전하던 제이티비시 뉴스 앵커는 구출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에게 같은 학교 친구의 죽음을 전했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 한 명이….” 참사의 공포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학생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 던져졌고, 생존 학생은 그 질문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하루 종일 네티즌들의 질타가 이어졌고, 그날 저녁 손석희는 사과문을 읽으며 뉴스를 시작해야 했다.

“(전략) 오늘 낮에 여객선 침몰 사고 속보를 전해드리는 과정에서 저희 앵커가 구조된 여학생에게 건넨 질문 때문에 많은 분들이 노여워하셨습니다. 어떤 변명이나 해명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나마 배운 것을 선임자이자 책임자로서 후배 앵커에게 충분히 알려주지 못한 저의 탓이 가장 큽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속보를 진행했던 후배 앵커는 지금 깊이 반성하고 있고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많은 실수를 했었고 지금도 더 배워야 하는 완벽하지 못한 선임자이기도 합니다. 오늘 일을 거울삼아서 저희 제이티비시 구성원들 모두가 더욱 신중하고 겸손하게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깔끔한 사과라 생각하던 차, 누군가 냉소적인 지적을 던졌다. “속보를 진행한 앵커가 독단으로 저지른 실수라 생각하지 않아. 그런 질문을 던졌다는 건 해당 뉴스 프로듀서가 그런 질문을 하라고 사인을 냈다거나, 혹은 뉴스룸 내부에 그래도 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존재했다는 이야기야. 그건 방송국 시스템의 문제고, 손석희는 개인이 아니라 보도부문 사장으로서 사과했어야 해. 저 사과문을 다시 한번 읽어봐. 보도부문 사장 손석희는 없고, 후배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걸 사과하는 베테랑 앵커 손석희만 있잖아. 방송국 차원에서 사과하고 시스템 구축을 약속해야 할 상황에서 ‘저의 탓이 가장 크’다며 자기 개인의 잘못으로 갈음하고 ‘더욱 신중하고 겸손하게 정진하’겠다고 얼버무리며 끝내지. 저건 근사해 보일지언정 제대로 된 사과는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간사해서 그 사과문에 대한 찜찜함은 금세 잊혔다. 마지막까지 진도 팽목항에서 철수하지 않고 실종자 가족들 곁을 지키던 제이티비시의 젊은 기자들을 향한 고마움이나, 다른 뉴스들이 헤드라인에서 세월호 관련 뉴스를 내리고 시야를 돌릴 때도 끈질기게 세월호 이슈를 놓지 않는 손석희를 향한 감탄은 그 사과의 기억을 지우기에 충분했으므로. 그리고 다시 4월이 됐다.

2년전 JTBC로 이직 택한 ‘도박’
지금까진 분명 크게 딴 판이었다
세월호 보도 사과는 찜찜했지만
200여일간 팽목항 외면하지 않고
끈질기게 이슈를 놓지 않았으니…

그리고 이번엔 ‘성완종 육성’ 보도
정당한 경쟁 아닌 반칙이었지만
그는 제대로 사과해야할 순간을
어이없이 놓쳐 버렸다
동의 어려운 해명만 늘어놓은채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둔 4월15일 저녁, 그 찜찜한 사과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일이 터졌다. <경향신문>이 16일치 신문에 전문을 공개하겠노라 예고했던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 경향신문 기자의 통화 내용을, 제이티비시가 ‘뉴스9’에서 공개해버린 것이다. 제이티비시는 경향신문이 검찰에 통화 원본 녹음파일을 증거자료로 제출하는 과정에 참여했던 디지털 포렌식(증거 추출) 전문가 김아무개씨를 설득해 복사본을 빼냈다. 성 전 회장의 육성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던 유족들은 녹음 내용을 들려주겠다는 예고가 나간 뒤 제이티비시에 전화해 보도를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손석희는 분명 경향신문 기자와의 통화 내용을 공개하겠다면서도 “다른 곳에서 입수했”으니 “경향신문과는 상관이 없”다며 공개를 강행했다. 이유는 “시민의 알 권리”였다.

과연 시민의 알 권리가 그렇게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을까? 불과 몇 시간 뒤 조간에 보도내용 전문이 나갈 예정이었는데? 보도윤리나 상도의의 차원이 아니라 다른 언론보다 먼저 특종을 내고자 하는 기자 입장에 서야 비로소 그 결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나 또한 짧게나마 기자 밥을 먹었으니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으나, 선뜻 동의하긴 어려웠다. 업계 종사자들 중 상당수는 제이티비시와 손석희의 선택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유혹을 참아낼 용기가 있는 언론이 있을까’를 이야기했고, 손석희가 16일 뉴스에서 입장을 밝힌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은 16일 방영된 ‘뉴스룸’의 클로징 멘트다.

“(전략) 글자로 전문이 공개된다 해도 육성이 전하는 분위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봤고, 육성이 갖는 현장성에 의해 시청자가 사실을 넘어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경쟁하듯 보도했느냐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것이 때로는 언론의 속성이라는 것만으로는 양해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감당해 나가겠습니다. (중략) 입수 경위라든가 저희들이 되돌아봐야 할 부분은 냉정하게 되돌아보겠습니다. 저나 저희 기자들이나 완벽할 순 없습니다만 저희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략)”

경향신문이 중요한 정치인들의 이름과 액수가 나오는 대목은 유튜브를 통해 육성 녹음을 공개해왔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마치 문자매체로는 진실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듯한 그의 해명은 동의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화를 냈던 것은 경쟁 보도여서가 아니라, 정당한 경쟁이 아닌 반칙 보도여서였다. 타사의 취재물을 중간에서 가로채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속성이 아니며, 손석희는 그나마 그 입수 경위가 보안 서약까지 걸린 타사의 취재물을 가로챈 것이라는 사실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 차원의 보도윤리와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사과해야 할 순간이 오자, 손석희는 다시 “나름대로의 진정성”을 이야기하며 뉴스를 마쳤다.

어떤 분야에서든 성취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손석희가 종편이라는 한계에도 신뢰를 획득하기까지는 200여일간 남들이 다 떠나가는 팽목항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 선의까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성취를 무너뜨리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손석희와 그의 스태프들은 제대로 사과해야 할 순간을 어이없이 놓쳐 버렸다. 2년 전 이맘때 나는 그의 이직을 도박에 비유했다. 지금까지 분명 크게 따는 판이었다. 그런데 막 방금, 손석희가 칩을 잃기 시작했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그리고 남은 이야기. 말이 나왔으니 나 또한 늦기 전에 한 가지 정정하고 사과할 일이 있다. 몇 달 전 나는 장동민이 방송에서 이룬 성취가 ‘본능적으로 상대와 자신 간의 거리를 적정선에서 유지하는’ 그의 균형감각에 기인한 것이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 그가 최근 문제가 된, 적정선은 고사하고 상식선을 넘어선 여성 혐오 발언을 했다는 사실까지 알고도 쓴 글은 아니었다. 그러나 글 쓰는 걸 직업 삼은 사람이라면 이 정도 사안은 자료조사 단계에서 파악을 하고 글을 썼어야 하며, 미처 알지 못했다는 변명 뒤에 숨는 것은 직업윤리에 어긋난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더 신중한 자세로 글을 쓸 것을 약속드리며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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