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혁오’가 문화방송 <무한도전>에 출연한 직후 인터넷에서 벌어진 ‘힙스터’ 논쟁은 문화적 다양성이 착종되지 않은 채 ‘힙’함으로만 소비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지난 5월 밴드 혁오의 쇼케이스 공연 장면. 두루두루에이엠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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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무한도전> 때문에 알게 된 게 아니라 원래 좋아했다고 해명하고 다닐 걸 생각하니 아찔하다.” 밴드 혁오가 2015 <무한도전> 가요제 라인업에 초대된 직후 한 음원 사이트 댓글난에 올라온 댓글이다. 그 당혹감을 왜 모르겠는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조용히 입소문을 타며 인지도를 키워가던 팀이,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더니 그 주 주말엔 음원 차트를 역주행해 버렸는데. 마치 고즈넉하던 단골 밥집이 <수요미식회>에 소개된 뒤 30분은 줄을 서야 입장이 가능한 집이 되었을 때의 당혹감, 늘 유지해오던 헤어스타일이 어느 날 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아이돌 가수가 등장한 이후부터 졸지에 카피캣 취급을 당할 때의 불쾌함 같은 그거. 그 감정을 심하게 느끼는 이들이 제법 많았던지, 혁오의 <무한도전> 출연을 알리는 뉴스 댓글난엔 “혼자만 알던 밴드를 빼앗겨 버렸다”는 상실감의 토로가 줄을 이었다. “혼자만” 알던 밴드를 빼앗겼단 토로가 “줄을 이었다”는 서술에서 알 수 있듯, 사실 혁오는 이미 널리 입소문을 탄 팀이었고 언제 유명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팀이었다. 펑크나 디스코의 리듬 위에 잘 벼려진 때깔의 기타 리프를 얹고, 그 위에 까슬한 질감의 보컬로 방점을 찍은 스물세살 청춘들의 밴드. 게다가 밴드의 리더 오혁에겐 자신의 목소리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곡과 가사를 쓰는 재능이 있고, 20대 초반의 그가 쓴 가사 “사랑도 끼리끼리 하는 거라 믿는 나는 좀처럼 두근두근거릴 일이 전혀 없죠”(‘위잉위잉’)라거나 “그냥 뭐랄까. 나는 늘 항상 어려웠었어.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날 그리도 잘 알까”(‘후카’) 같은 대목에선 외롭긴 싫지만 그렇다고 이해받지 못하는 관계에 목을 매고 싶진 않은 세대의 감수성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멤버 전원이 작사 작곡 능력을 갖춘, 감각적인 음악을 만드는 데뷔 1년차 밴드이니, 이쯤 되면 안 알려지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미 홍대나 경리단길처럼 유행에 민감한 동네에선 가게마다 혁오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혼자만 알던 밴드를 빼앗겨 버렸다”는 말은 다소 별스러운 호들갑이었으리라. 이 유별난 투덜거림은 인터넷상에서 “힙스터들의 유세”로 정의되더니 이윽고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언제부터 혁오가 너희만 아는 밴드였다고 그러느냐”는 사실 적시에서 시작해서 “너희가 혁오를 전세 냈냐”는 비아냥, “그놈의 힙 타령 좀 그만하라”는 피로감 호소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지난 3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힙스터 음악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한 리더 오혁의 답변까지 인용되며 인터넷상에선 한 차례 ‘힙스터 때리기’ 축제가 열렸다. “저희는 힙스터가 아니에요. 힙스터는 유행을 수용할 뿐 만들어내지는 못하죠. 저희 음악을 좋아하는 분 중에 힙스터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힙스터를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박세회 에디터, ‘밴드 혁오, “하나의 스타일로 우리 음악을 특정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유행에 민감한 동네에선가게마다 혁오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혼자만 알던 밴드를 빼앗겼다”는 말은
다소 별스러운 호들갑이었으리라 잘난체하는 ‘힙스터 논쟁’ 끝내고
제 취향을 탐구하고 개발할 만한
사회적 여건을 상상하라 ‘힙스터’가 어떤 의미인지 감이 안 잡힐 독자들을 위해 거칠게 정의 내리자면, 당대 주류가 된 유행에 대한 반발로 비주류 하위문화에 대한 애정과 제 감식안을 과시하며 그를 통해 남들로부터 자신을 구별짓는 이들을 ‘힙스터’라 부른다. 남들보다 먼저 최신 조류를 선취했다는 우월감을 제 정체성의 일부로 삼는 것인데, 소수의 힙스터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유행을 좇되 그것이 주류의 유행으로 등극하는 순간 다시 남들이 미처 찾지 못한 ‘힙’한 것을 찾아다닌다는 점에서 양가적 존재들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들에 대해 소설가 김사과는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해 “문화적 화전민”이라 일컬은 바 있는데, 젠트리피케이션(고급주택단지화. 최근엔 낙후된 지역의 독특한 지역색에 반해 유입된 외부인들에 의해 정작 그 색깔을 창출해 낸 원주민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설명할 때 쓰이는 단어다.) 현상의 제일 앞줄에 힙스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홍대 권역의 경우. 홍대 고유의 색깔을 만들어낸 가수들과 예술가들, 개성있는 카페 주인장들은 급상승하는 임대료를 이기지 못하고 홍대 앞을 떠난 지 오래다. “진짜 홍대의 힙함”을 찾아 해당 지역까지 발걸음을 넓히는 이들을 쫓아 상권도 함께 이동하고, 합정-상수로 밀려났던 이들은 다시 망원으로, 연남으로, 연희동으로 정신없이 밀려나고 있다. 덕분에 이제 ‘홍대 앞’은 어지간한 구 하나를 상회하는 사이즈의 지역을 뭉뚱그린 표현이 되어 버렸다. ‘홍대 앞’이란 기호만 남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은 휘발된 셈이다. ‘문화적 화전민’이란 표현 안에는 이렇게 홍대 앞에서 연남동으로, 북촌에서 서촌으로, 가로수길에서 경리단길로 한철 소비를 마치고는 다음 트렌드를 찾아 이동하는 이들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다. 화전이 급속도로 지력을 소진시키고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불모의 땅만을 남기는 것처럼, 해당 문화에 대한 존중 없이 남들이 미처 개척하지 않은 유행을 좇아 다니느라 결과적으론 문화적 불모지만 남기는 이들에 대한 비아냥. 기껏해야 감식안을 자랑거리로 삼아 우월감을 느끼려는 이들을 변호할 생각은 없으나, 사실 힙스터 현상의 이면엔 각자가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탐구하고 발전시켜 나갈 충분한 시간적·물질적 여유가 없는 시대에 대한 불만이 작동하고 있다. 여유가 없는 이들은 문화적 취향을 탐구하는 대신 문화 ‘산업’을 통해 대량생산으로 뿌려지는 주류의 유행을 따르는 쪽을 택하는데, 힙스터들은 그러한 몰개성의 시대에 대한 염증 탓에 주류로부터 탈주하는 데 집착한다. 자신을 표현할 언어로 소비자본주의를 채택한 탓에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낸다거나 그 취향을 뚝심있게 이끌고 가지 못한다는 명확한 한계가 있지만, 그 점을 비웃느라 다양한 취향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부재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놓친다면 그 또한 생산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힙스터’ 놀음을 끝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힙스터를 놀리는 게 아니라 굳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애써 증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양성을 갖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혁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리더 오혁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혁오는 힙스터가 아니다. 심지어 이들이 소비되는 양상조차 전혀 ‘힙’스럽지 않다. 이들이 오랫동안 대중의 시야 밖에 있던 팀인 것도 아니고, 대중적이지 않은 멜로디를 쓰는 팀도 아니지 않나. 혁오가 첫 앨범을 발매한 것은 지난해 9월이었고, 등장하자마자 최신 유행의 맨 앞줄에 서서 각종 페스티벌의 초대 대상 1순위가 됐다. 소울이나 펑크, 디스코, 전자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젖줄을 대고 있는 혁오의 음악은 세대를 불문하고 즐길 수 있을 법한 대중적인 멜로디라인을 갖추고 있다. 어디를 봐도 힙스터 현상과는 거리가 먼 양상이지만, 혁오가 유명해졌음을 투덜대는 이들 중 대다수는 혁오를 ‘힙’한 무언가로 소비하고 있다. 안 그래도 힙스터에 질릴 대로 질린 이들 입장에서야 때마침 때리기 좋은 이들이 등장한 셈이고 말이다. 힙스럽지 않은 걸 힙스러운 것처럼 소비하고, 힙스터 축에도 못 끼는 이들을 힙스터라고 놀리는 이 이상한 허수아비 놀음의 악순환은 보는 이를 서글프게 만든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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