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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18 19:57 수정 : 2015.12.19 13:37

한국방송 <해피 선데이> ‘1박2일’의 영웅들은 진즉에 떠났다. 그 뒤엔 ‘소년가장’ 유호진 피디의 성장기라는 큰 서사가 프로그램을 관통한다. 한국방송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아, 그런데 전날에 (형) 보내고 다음날에 갑자기 새 멤버가 끼면 좀 그래.” 눈물로 김주혁을 떠나보낸 지 12시간여 만에 새 인턴 멤버를 맞이하는 독한 스케줄, 한국방송 <해피 선데이> ‘1박2일’(이하 ‘1박2일’) 멤버들은 이렇게 일정을 잡은 제작진을 농담 섞어 타박했다. 나이상으로 최연장자가 된 김준호가 맏형 자리가 부담스럽다며 차태현에게 형이라 부르는 이 기괴하고 어색한 광경 속에서, 이 야박한 스케줄을 계획하고 집행한 당사자 유호진 피디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프로그램의 선장이고 현장을 통제해야 하는 최종 책임자이니 감정에 휘말리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으나, 오랜 세월 ‘1박2일’을 지켜봐 온 시청자들이라면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으리라. 아, 이제 드디어 연출자 유호진의 성장기가 온전히 한 사이클을 돌았구나.

돌이켜보면 유호진은 ‘1박2일’ 시즌3 내내 소년가장 같은 인상이었다. 프로그램이 가장 잘나가던 시즌1 때 몰래카메라를 당하며 신고식을 치렀던 ‘신입 피디’ 출신 아닌가. 연출 경력 만 7년차의 젊은 나이로 ‘1박2일’의 키를 잡았을 때, 현장에는 경력이 기십 년이 다 되어가는 스태프들이 득시글거렸다. 어지간히 기억력 좋은 사람들이라면 이제 이름을 외웠을 법한 강찬희 카메라감독이나 ‘국제심판’ 권기종 조명감독처럼 ‘1박2일’의 시작을 함께했던 이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으니, 현장 그림을 보면 여전히 유호진이 막내처럼 보이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지곤 했다. 실제로 시즌3의 멤버들이 제작진의 요구를 거부하고 차를 몰아 촬영 현장을 탈주하는 사고를 쳤을 때, 이 ‘원로’ 스태프들이 능란하게 제 경험에 기반해 대처 방안을 짜며 느긋하게 협상안을 모색하는 동안 유호진은 그 가운데에서 어쩌면 좋을지 몰라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런 모습은 사실 서수민 책임프로듀서가 유호진에게 ‘1박2일’을 맡기던 순간부터 의도했던 그림이었다. “무슨 사극 같잖아요. 망해가는 기와집에 13살짜리 막내 도령이 와서 곳간 열쇠를 쥐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스토리를 선배들은 연출하고 싶어 했어요. 프로그램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고민 자체를 드라마로 만든 거죠.”(2015년 1월26일 <피디저널> “‘1박2일’은 거대한 인간실험”) 예전의 영광을 잃어가는 프로그램을 살려야 하는 제작진은, 에피소드 단위가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를 관통하는 큰 서사를 필요로 했다. 시즌1의 막내 유호진이 시청률 하락과 영향력 감소로 폐지 이야기까지 오갔던 ‘1박2일’에 돌아와 시즌3의 수장이 된다는 서사는 그 맥락을 이해하고 있던 팬들에겐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년간의 ‘1박2일’ 시즌3는 리얼 버라이어티인 동시에 유호진의 성장 드라마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해피 선데이>는 1부(‘슈퍼맨이 돌아왔다’)도 2부도 모두 육아 성장물”이란 농담을 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고아가 되기 전에는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했다
일을 가르쳐 준 선배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후에야
시즌3 수장이 되었고
소년가장 같은 표정으로
가망없어 보인 프로를 재건해냈다

이제 서수민 책임프로듀서도 없고
2년내내 기댔던 김주혁도 떠났다
유호진은 고아가 된 것이다

팬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게 뭔지 안다는 듯, 유호진은 첫회부터 산골 오지마을로 멤버들을 끌고 들어가 혹한기 대비훈련을 시키며 시즌1의 정서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유호진은 나영석처럼 집요한 협상가가 아니고 멤버들 또한 강호동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이들이 아니었다. 시즌1의 정서는 환기하되 자신들만의 문법으로 시즌3를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 유호진과 멤버들은 어딘가 소심하고 나른하며 피곤한 정서로 시즌3를 꾸려나갔다. 물론 앞의 시즌에서 그랬듯 그 와중에 누군가는 웃통을 벗고 코밑에 콧물을 그렸고, 자신의 무식이 탄로날 때마다 자폭했지만. 멤버들은 강호동과 나영석이 그랬듯 피말리는 눈치 싸움으로 협상을 질질 끌지도 파격적인 제안으로 판을 뒤집지도 않았다. 그저 늘 예상하지 못한 곳에 끌려오는 것에 대한 당혹감을 투덜거렸고, 거세게 항의하기보단 소심하게 구시렁거렸다.

재미있게도 그건 유호진 본인의 성격이기도 하다. 유호진은 여러차례 인터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심심하고 조용한 사람이라 묘사했다. 패션지 에디터와 소설가를 거쳐 예능피디가 된 것도 티브이를 사랑한 결과가 아니라 한국방송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길 원했던 결과였고, 입사하기 전에 제대로 본 예능프로그램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처음 예능국에 발령받았을 때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다큐멘터리 부서로 갈 수 있길 바랐고, 지금도 툭하면 ‘1박2일’ 메인 피디 업무를 ‘고난’이라 묘사하며 ‘평생 하고 싶진 않다’고 단언하는 사람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 예기치 않게 끌려와 당황한 ‘초짜’의 삶. 우리는 이미 그가 이 낯선 필드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본 바 있다. 신입 조연출 자격으로 ‘1박2일’ 시즌1 현장에 처음 참여했을 때, 당시 출연진과 제작진은 모두 작당을 하고 유호진을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벌였다. 불같이 화를 내는 김C와 강호동 사이에 끼어서 진땀을 빼는 순간 갈 곳을 잃고 흔들리던 유호진의 눈빛은 전파를 타고 온 나라에 방송됐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유호진이 유독 김주혁에게만큼은 티가 나게 애착을 주며 화면 안에서도 서슴없이 “주혁이 형”이라고 부르는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정 면에서 자기 자신과 가장 많이 닮은 사람, 프로그램에 합류하고자 했던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늘 집에만 있고 친구도 없는데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였던 내성적인 사람 김주혁은 시즌3의 정조를 한 몸에 담아낸 상징적인 존재였다. 평생 해 볼 일이 없던 코끼리 코 돌기는 어지럽고, 굳이 밝힐 이유가 없었던 지식의 결여는 만천하에 공개되었으며,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기를 못 알아보는 당혹스러움의 연속 속에서 당황해하는 김주혁은 예전 유호진이 지어 보였던 바로 그 표정으로 여행에 임했다.

그렇게 의지하고 애착을 뒀던 프로그램의 맏형이 고민 끝에 떠나가는 순간, 유호진은 최대한 공을 들여 그를 정성껏 보내준 뒤 12시간 만에 다음 녹화를 강행했다. 어디까지나 보안과 일정 탓이었겠지만, 유호진이 내린 결정은 미묘하게도 강호동이 시즌1을 떠난 직후 나영석이 보여줬던 단호한 태도와 닮은 구석이 있다. 돌이켜보면 연출자로서의 나영석의 역량이 가장 돋보였던 순간은 ‘1박2일’ 시즌1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 강호동이 빠진 직후였다. 떠난 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크지만 그와 동시에 프로그램을 계속 순항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나영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머지 멤버들을 정신없이 굴려서 프로그램의 가치를 입증해냈다. 연출자가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간판이자 맏형을 떠나보내고 모든 것의 책임을 오롯이 혼자 진 순간, 비로소 강호동이 없는 나영석, ‘1박2일’이 아닌 나영석의 가능성이 오롯이 드러난 것이다. 어쩌면 유호진에게도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인지 모른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소설가 듀나는 자신의 소설집 <아직은 신이 아니야>의 수록작 <성인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아가 되기 전에는 어른이 된 것이 아니다.” 유호진은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 준 이명한, 나영석, 신원호 등의 선배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후에야 시즌3의 수장이 되었고, 아무리 봐도 소년가장 같은 표정으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프로그램을 재건해냈다. 이제 그와 함께 <해피 선데이>에 들어왔던 서수민 책임프로듀서도 없고, 2년 내내 의지하고 기댔던 맏형 김주혁도 떠나갔다. 비유하자면 ‘연출자’ 유호진은 온전히 고아가 된 것이다. 아무도 맏형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지 않아서 새 멤버로 맏형을 구해왔으면 좋겠다고 구시렁대는 멤버들 앞에서, 유호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인턴 멤버를 영입하고 새로운 여행길에 오른다. 맏형 없는 세상에서 유호진의 유년기가 방금 막 끝났다. 이제 바야흐로 어른의 시간, 더 큰 사이클을 그려 보이며 자기 자신을 입증해 보일 차례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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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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