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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25 10:55 수정 : 2017.11.25 18:52

가수 윤종신은 지난 6월말 신곡 ‘좋니’를 발표했다. 1990년대 감수성을 담은 이 ‘익숙한’ 발라드곡은 발표되자마자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에 올랐다. 미스틱엔터테인먼트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영리한 ‘발라드 장인’ 윤종신

가수 윤종신은 지난 6월말 신곡 ‘좋니’를 발표했다. 1990년대 감수성을 담은 이 ‘익숙한’ 발라드곡은 발표되자마자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에 올랐다. 미스틱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7월 가수 윤종신의 신곡 ‘좋니’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 인기몰이
새 사랑 시작하는 옛 연인에게 전하는
어느 ‘찌질한’ 남자의 익숙한 추억팔이

‘오르막길’ 등 성숙한 어른 감성에서
사랑 ‘올인’하던 90년대 감성으로 회귀
대중은 왜 열광했나, 자기 감정 솔직한
‘스왜그’ 시대와 잘 맞아떨어진 이유

“정말 20대 초반·중반에 이별한 사람처럼, 가사도 그렇게 약간, 완숙한 사람(의 이별)이 아니고.” 2017년 7월 한국방송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을 때, 윤종신은 자신의 신곡 ‘좋니’를 ‘완숙하지 않은 사람이 절규하듯 부르는 이별 노래’라 설명했다. 과연 정확한 설명이었다. 노래 속 남자는 옛 연인이 새 사랑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잘했어. 넌 못 참았을 거야. 그 허전함을 견뎌내기엔”이라 말하며 상대의 연애가 제 빈자리를 채우려 서둘러 시작한 연애일 것이라 스스로 위안하다가, 결국 “솔직히 견디기 어려워”하는 자신을 토로하고는 “내 십분의 일만이라도 아프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1990년대 윤종신의 발라드를 들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남자다. “지금 내 곁”에 “나만을 믿고 있는 한 여자”가 있음에도 “너의 학교 그 앞을” 가끔 거닌다 말하며 옛사랑을 끝내 잊지 못하고 추억하는 남자(‘오래전 그날’), 혹은 옛 연인의 결혼식장에서 이건 이별이 아니라 “널 맡긴 거”라고 생각하며 “이 세상은 잠시뿐”이라 말하는 남자(‘너의 결혼식’). 이런 남자, 90년대에 참 많았다.

미숙한 그 남자의 90년대 발라드

윤종신만 그랬던 건 아니다. 90년대는 정말이지 사랑 하나에 요령 없이 목숨을 건 남자들의 비장한 발라드가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다. 물론 이별 앞에 서툴고 사랑 앞에 절박한 마음이야 발라드의 영원한 기본 정서라지만, 90년대만큼 발라드가 절박하고 처절했던 시절은 없었다. 굳이 둘 중 누군가 하나 먼저 죽는 상황을 가정하고는 “저 하늘이 나를 사랑해 어느 날 먼저 데려간대도 아름다운 세상 고운 너의 두 눈으로 내 몫까지 보아” 달라 말하는 남자(김경호, ‘나의 사랑 천상에서도’)랄지, “내 곁에 있어 달라는 말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떠날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물으며 “보이지 않게 사랑할 거”라고 혼자 다짐하는 남자(신승훈, ‘보이지 않는 사랑’), 고백조차 맨정신으로는 할 용기가 없어 술을 먹고는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아무에게나 늘 이런 얘기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니 마음을 받아 달라 말하는 서툰 남자(전람회, ‘취중진담’)들이 <가요톱텐>의 순위표를 서성였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좋니’는 사뭇 신기한 재회였다. 그가 최근 몇 년간 선보여 사랑받은 발라드 중 대부분은 어른의 노래였으니 말이다. 사랑이 일상에 우선순위를 넘겨줘야 하는 결혼생활을 오르막길에 비유하며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정인, ‘오르막길’)라 노래하고,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배우자에게 “그대란 사람이 내게 없다면 이미 모두 다 포기했겠지”(‘그대 없이는 못 살아’)라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는 성숙한 어른의 발라드. 그렇게 팬들과 함께 나이 먹어가는 줄만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더 늦기 전에 한번은 절규하는 발라드를 불러보고 싶다”며 옛 연인이 막 새로 연애를 시작하는 마당에 “네가 조금 더 힘들면 좋겠”다고 초를 치는 미숙한 남자를 다시 불러낼 줄 누가 알았으랴. 하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거리의 온 가게들이 ‘좋니’를 틀고 있는 지금은 모두가 안다. 90년대 언저리에서 냉동되었다가 고스란히 해동되어 불려 나온 이 남자는 생각보다 힘이 셌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실 가만히 음미해보면 ‘좋니’ 속의 남자는 90년대 발라드 속 주인공들보다 한층 더 뻔뻔하다. 90년대 발라드 속 남자들은 제 감정이 사실 찌질한 것이란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기라도 하지, 이 남자는 자신을 “뒤끝 있는 너의 예전 남자친구”라고 칭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 나 뒤끝 있다. 뭐?”에 가까운 이기적이고 직설적인 가사는 어쩌면 돌려 말하는 대신 제 감정을 한층 더 세게 표현하는 걸 진솔하다 여기는 ‘스왜그’의 시대에 어울리는 가사인지도 모른다. 윤종신이 한국방송 추석 파일럿 <건반 위의 하이에나>에서 선보인 ‘너를 찾아서’를 듣고 슬리피는 자신의 랩과 잘 어울릴 것 같다 말했고, 프로듀서 그레이 또한 가사의 직설화법에 감탄했으니까. “어디니, 무작정 찾아간다. 원래 나 이기적이었잖아. 내가 보고 싶고 내가 그리운 게 더 중요해. 멀리서 바라만 봐도 숨 쉬겠어.” 상대의 안위보다 제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누군가는 애절함 대신 ‘안전이별’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릴 법한 가사. 정작 윤종신은 가사가 내포한 위험을 잘 알고, 무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노래와 현실을 헷갈리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사실은 발라드 가사 속의 남자는 실제로 있다면 좀 ‘진상남'이에요. 진상이 안 되려고 ‘멀리서 보고만 간다'잖아요. 스토커란 얘기예요.”

이 지점에서부터 일이 조금은 재미있어진다. ‘좋니’의 열풍이 한차례 노래방과 유튜브를 휩쓸고 지나간 11월, 윤종신은 자신의 회사 미스틱에 소속된 신인가수 민서의 목소리를 빌려, 같은 곡조에 가사만 새로 붙인 답가 ‘좋아’를 발표한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수많은 가수와 지망생들이 ‘좋니’를 자신의 창법으로 다시 부른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그중에는 가수 미교가 가사를 고쳐 부른 여자 입장의 답가도 있었다. 여자 또한 남자를 그리워하지만 그 마음을 애써 숨기고 살고 있다는 내용의 노래를 듣고는 “아, 이거는 (이별의) 당사자인 이 여자의 마음이 아닐 수도 있는데” 싶었다는 윤종신은, 한 의류업체의 프로모션 제안을 받고는 여자의 입장에 서서 ‘좋아’를 쓴다. 그리고 ‘좋니’ 속에서 마냥 아련하게만 그려졌던 남자의 이별은, ‘좋아’의 여자에겐 제발 좀 빨리 끝났으면 싶은 지긋지긋한 이별이 된다.

“유난 좀 떨지마”, 여자의 ‘화답’

“사랑을 시작할 때 니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라 말하는 ‘좋니’ 속 남자의 말을 ‘좋아’의 여자는 이렇게 받아친다. “사랑을 시작할 때 내가 그렇게 예쁘다면서? 그 모습을 그가 참 좋아해.” 남자는 사랑을 시작할 때 여자가 예쁜 줄은 알았지,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정말 몰라줬”다. 남자가 이상적으로 기억하는 연애 시절은 여자에겐 생각만으로도 “아직도 힘들어”서 울었던 날들이고, 해서 여자는 묻는다. “너만 힘든 것 같니. 어쩜 넌 그대로니. 몰래 흘린 눈물 아니? 제발 유난 좀 떨지 마.” 조금만 더 아프다가 행복해 달라는 남자의 바람과 달리, 여자는 내가 언제 행복해질지는 온전히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간단해. 나는 행복 바랬어. 그게 언제든 넌 알 바 아닌걸.” 세상 혼자 아프고 혼자 먹먹해한 줄 알고 절규하던 미숙한 남자는, 너만 힘든 거 아니니까 적당히 해두라는 여자의 말 앞에서 조용히 돗자리를 접고 집으로 간다.

아무리 메가히트곡을 기반으로 했다 해도, 스스로 쌓아 올린 처절한 이별의 서사를 손수 해체하는 건 윤종신에게도 쉬운 모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은 제대로 통했다. ‘좋아’는 발표되자마자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기록한 건 물론, ‘좋니’보다 더 폭넓은 대중에게 어필 중이다. “음원 사이트 멜론에 따르면 ‘좋니'를 듣는 대중은 30~40대 남성이었다. 하지만 ‘좋아'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듣고 있으며 그중 50% 이상의 청취자가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아시아투데이> “‘좋니’ 이어 ‘좋아’도 인기…데뷔 전 음원올킬 ‘괴물신예’ 민서” 2017년 11월23일치) ‘좋니’에서 일방적으로 제 이별을 신화화하던 남자의 서사를 내심 부담스러워했던 이들까지, ‘좋아’의 메시지에는 화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좋아’는 ‘좋니’의 예기치 않은 메가히트에 기뻐하면서도 내심 모든 ‘좋니’ 뒤에는 ‘좋아’의 사연도 있다는 사실이 묻힐 걸 걱정한 이별전문가 윤종신이 제공한 백신은 아니었을까? 물론 대중의 기호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영리한 사업가 윤종신이 창과 방패를 한 좌판에 늘어놓고 시간차로 매진시키는 천재적인 세일즈라 생각하는 것도 또 하나의 독법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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