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진하는 힘
머리로는 끊임없이 부정했던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할 도리가 없어 끝내 직진하고야 마는 마음의 열망을 팔뚝질에 담아낸 <1987> 속 연희(김태리)의 뒷모습은 관객의 뇌리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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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관심없던 87학번 새내기에서
‘잘생긴 운동권 오빠’에게 이끌려
민주화 운동 나서게 된 존재일까? 질문 둘. 영화가 1987년 당시 투쟁에 나섰던 여성들을 생략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영화 속에서 연희(김태리)가 처음으로 접하게 된 명동 미도파 기습시위를 주도한 것도, 연세대 만화동아리 ‘만화사랑’의 영상 상영회를 준비한 것도, 연대 정문 가두시위에서 현수막을 나눠 들고 시위의 전위로 나선 것도,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시청 앞 광장 시위를 진두지휘하는 목소리도 여성이다. <1987>은 영화의 중심 인물로 여성을 내세우지 못하는 한계를, 당대 투쟁에 나섰던 여성 투사들을 장면마다 묘사하는 것으로 벌충한다. 충분히 그렸다고는 차마 말하기 어려우나, 최소한은 한다는 의미다. 그녀는 왜 ‘독재 타도’를 외쳤나? 질문 셋.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뜻있는 외삼촌’이나 ‘잘생긴 운동권 오빠’에게 이끌려 의식화를 거친 뒤 운동에 나서게 된 존재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수감 중인 민통련 상임위원장 이부영(김의성)의 편지를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에게 전달하기 위해 연희는 늘 길거리 불심검문에 붙잡히곤 하는 외삼촌(유해진)을 대신해 전서구 노릇을 한다. ‘데모 같은 건 안 할 것처럼 생긴 여자애’의 외양으로 검문을 무사통과하는 연희는 김정남과는 익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김정남을 찾아온 함세웅 신부(이화룡)에게는 냉소적인 농담을 던진다. “절에 왜 신부님이 계실까? 아, 이 아저씨가 수괴? 자수하고 광명 찾으세요.” 이런 일을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닌 연희는 왜 한사코 운동과 거리를 두려고 할까? 연희는 이미 수년 전 아버지가 노동조합 운동을 하다가 좌절하는 걸 목격했다. 연희의 증언에 따르면 노조를 같이 하자고 아버지의 옆구리를 찌르던 사람들은 상황이 안 좋아지자 아버지를 남겨두고 도망쳤다. 동지들의 배신에 파업 투쟁의 여파를 떠안아야 했던 연희의 아버지는 좌절감에 못하던 술을 마시고는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연희는 외삼촌이 좌절을 겪는 것도 봤다. 연희의 외삼촌 한병용은 교도관 노조를 설립하려다가 파면된 뒤 복직한 인물이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차례로 좌절하는 걸 지척에서 지켜본 연희는 운동 자체에 회의를 느낀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책임지지도 못할 사람을 끌어들여 죽음의 행렬을 이어 나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만화사랑’에서 주최한 비밀 영상회에서 5월 광주의 기록 영상을 본 연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강의실을 뛰쳐나간다. 뒤따라온 남자 선배(강동원)는 연희가 이 영상을 처음 보고 받은 충격에 뛰쳐나갔을 줄 알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연희가 선배의 말을 끊고 뱉은 말은 “왜 만화 동아리에서 이런 걸 틀어요?”다. 싸우다 죽은 사람의 유가족인 연희는, 의도적으로 투쟁과 의식화로부터 멀리 달아났던 연희는, 만화 동아리 간판을 걸고는 사람들을 의식화시키려는 만화사랑 사람들에게 묻는다. 어떻게 싸울 거냐고, 저자들과 총칼을 들고 싸우기라도 할 거냐고, 싸워서 이길 수는 있냐고. 아마 그 말들 뒤에는 “당신들이 앞으로 다칠 사람들을 책임질 수는 있느냐”는 말이 숨겨져 있었으리라. 연희는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너무 잘 알아서 거리를 둔다. 연희가 한사코 ‘마이마이’에 꽂은 헤드폰으로 제 귀를 가리는 행위는 연희야말로 운동의 당위에 대해 이미 알 만큼 알지만 그 한계조차 봐 버렸기에 희망을 걸 수 없어서 외면하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귀담아들으면 자신도 끌릴 것을 알기에, 그는 애초에 귀를 닫아 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니 연희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87학번 새내기였다가 역사의 굴레 앞에서 자각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하는 건 연희를 절반만 파악한 곡해의 결과인 셈이다. 파업투쟁 실패한 아버지 지켜보며
운동의 ‘한계’ 깨달아 내면적 갈등
그럼에도 ‘호헌 철폐’ 외친 까닭은
역사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러던 연희가 움직이는 건, 한사코 거리를 둬 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마저 끝내 다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외삼촌은 남영동에 끌려갔고, 한달음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달려가 외삼촌을 풀어내라고 외치던 연희 또한 승합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인적 드문 시골길에 버려졌다. 대책도 없으면서 싸우지 않고는 못 견디겠노라 배시시 웃던 선배도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터진 이후에도 여전히 나서지 않는 편이 다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안전한 길일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1987년의 승리를 눈 있고 입 있는 자 모두 나서서 한목소리로 호헌 철폐를 외쳐 쟁취해낸 역사라고 기억하고 싶어하지만, 그게 꼭 진실인 것은 아니다. 2016년 촛불에 끝끝내 동참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1987년의 거리를 마지막까지 외면하고 동참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는 자신이 거절했던 외삼촌의 마지막 부탁을 완수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운집한 시청 광장 앞으로 달려가 기어코 버스 위로 올라가 팔뚝질을 하며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다. 외삼촌이 잡혀가고 선배가 사경을 헤맬 지경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함께 모여준 이들과. 본인이 머리로는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던 운동이 자신에게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간 그 폭력적인 시대를 끝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는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1987>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이자 유일한 창작인물인 연희(김태리).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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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열장 속 추억 아닌 온전한 ‘그날’의 기억, 1987
⊙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1987년을 정면으로 마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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