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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29 09:36 수정 : 2018.12.29 13:40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방송스태프들의 ‘노동 2018’

올해도 스태프 부상, 사망 잇따라
제작사는 ‘본인 질병’ 발뺌하지만
드라마 촬영현장 노동 여전히 열악
수면부족 강행군하다 응급실행도

방송사는 제작사에 책임 전가
제작사는 ‘턴키계약’으로 나몰라라
드라마 속 거창한 정의는 어디에?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지난 8월 추혜선 정의당 의원과 함께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드라마 제작 현장의 촬영 스케줄을 공개하며 정부와 방송사, 제작사에 대한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한 개선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몇년 전의 일이다. 그 무렵 한 방송사 특집극의 조악한 완성도를 혹평한 나는, 해당 드라마를 연출한 프로듀서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장르물 드라마를 만드느라 자신과 작가,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가 몹시 고생했으며, 용기를 내어 새로운 시도를 한 그 많은 사람의 고생이 나의 리뷰 때문에 헛된 것이 되었다며 분노했다. 통화 뒤 몇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는 왜 스태프들의 고생이 허사가 된 걸 내 탓이라 말한 걸까? 스태프가 고생하지 않도록 노동 강도와 시간을 조율하는 것, 어쩔 수 없이 고생을 하게 된다면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고 복지를 강화함으로써 제대로 보상하는 것은 비평가의 일이 아니라 방송사와 제작사의 책임이다. 비평가 한명의 혹평 때문에 고생한 보람이 죄다 사라진다면, 그 현장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제공한 노무에 대한 보람을 실질적인 보상에서 찾는 게 아니라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타인의 인정과 칭찬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어쩌면 그 프로듀서는 의도치 않게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의 현실을 자백한 건지도 모른다. 언론의 호평 없이는 고생하는 보람도 없는 현장이라고, 그러니 평이라도 좋게 해 달라고.

‘황후의 품격’ 촬영 10일간 207시간 노동

새삼스레 수년 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올 한해의 시작과 끝을 모두 불미스러운 소식으로 열고 닫았기 때문이다. 올해 1월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년 공개 예정)의 미술 스태프로 참여한 고아무개(33)씨가 귀가 중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쓰러져 뇌동맥류 파열로 뇌사 판정 끝에 사망했다. 7월에는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카메라 스태프 김규현(30)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두 드라마의 제작사 모두 애도를 표하면서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를 흘리기 바빴다. “고인은 사망 전 이틀간 촬영 스케줄이 없어 쉬었다”(<킹덤> 제작사 쪽)거나, 고인의 사인인 ‘내인성 뇌출혈’이 “외부적 요인이 아닌 본인이 가지고 있던 질병에서 발생하는 뇌출혈로 알고 있다”(<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제작사 쪽)는 식의 해명이 담고 있는 함의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지 않으냐는 항변이겠지.

상황이 이러니 드라마를 온전히 드라마로만 평가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올해 가장 히트한 드라마 중 하나인 오시엔(OCN) <손 더 게스트>는 1주에 87시간35분~95시간40분 근로를 강행하며 시간외근로수당과 야간근로수당도 지급하지 않는 살인적인 일정으로 제작됐고, 같은 방송사의 <플레이어>는 9월29일~10월1일 3일 동안 하루 수면시간이 채 3시간에도 못 미치는 강행군을 유지했다. 10월7일에는 23시간 촬영이 이어졌는데, 스태프들이 연이어 고통을 호소했음에도 휴식시간이 보장되지 못해 결국 9일에는 카메라 스태프가 119에 실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가진 놈들이 불법으로 모은 더러운 돈을 찾아 터는 유쾌·통쾌 머니 스틸 액션 드라마”를 표방한 <플레이어> 제작 현장은, 사실 근로기준법을 적극적으로 위반하는 이들이 불법으로 돈을 모으는 범죄 현장이었던 셈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작품 내적인 요인만 평가할 수 있을까? 자칫 나의 호평이 “고생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은 작품을 완성했으니 보람 있는 일 아니냐”는 식으로 열정페이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쓰이는 건 아닐까?

이게 어디 씨제이이엔엠(CJ ENM)만의 일이랴. 제이티비시(JTBC) <라이프>는 하루 14~20시간, 같은 방송사의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은 하루 15~23시간 촬영을 이어갔다. 문화방송(MBC) <배드파파> 스태프들은 근무일 기준 하루 평균 17시간40분을 노동했고, 11월 초부터는 하루 16시간 이상 주당 5~6일을 일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이하 방송스태프노조) 쪽은 최승호 문화방송 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 뒤 문화방송 사옥을 방문했지만, 보안요원들은 노조원들과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의 사옥 출입을 가로막았다. 같은 방송사의 <숨바꼭질>은 촬영 진행 기간 하루 평균 18시간 이상 장시간 촬영에 시달렸고, 7월30~31일과 8월14~15일 이틀 동안에는 40시간 넘게 촬영이 이어졌다. 에스비에스 <황후의 품격> 촬영일지는 더 끔찍하다. 10월10일자 근로시간 29시간30분, 10월23일자 근로시간 28시간30분, 11월21~30일 열흘 동안의 총 207시간 노동. 에스비에스는 ‘29시간30분’ 안에 지방으로 이동하는 시간과 대기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니 실제 근로시간은 19시간38분이라고 반박했지만,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과 법원의 판례 모두 ‘사용자의 지휘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시간’과 ‘사용자의 지휘 아래 이동하는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하고 있다. 방송사는 달라도 착취는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문제제기 스태프 ‘블랙리스트’ 의혹도

한해를 마무리할 무렵엔 더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른바 ‘드라마 제작 현장 블랙리스트’ 소식이 그것이다. 11월30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방송스태프노조와 전국영화산업노조의 합동 기자회견에서, 방송스태프노조는 노조 간부들이 수개월째 일감이 끊겨 생계를 위협당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노조 간부들은 한국 드라마 촬영 현장의 악습인 턴키 계약 관행(촬영, 조명 등 파트별 감독급과 프로젝트 전체를 ‘용역비’로 일괄 계약하는 방식으로, 장비료·인건비 등을 따로 명시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일괄 계약하기 때문에 파트별 스태프들에 대한 노무 관리 책임을 파트별 감독급 스태프에게 전가할 수 있다)을 폐지하고 스태프 한명 한명과 개별 계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해왔는데, 이들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웠던 드라마 제작사들이 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는 영화와 광고 현장의 스태프들을 직접 섭외해 턴키 계약 관행을 유지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드라마들은 언제나 정의로운 세상을 그린다. 사악한 재벌 3세들에 맞서서 정의를 구현하는 형사나 검사,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언론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들의 활약으로 평범한 서민들이 하루하루의 행복을 되찾는 비전을 그린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온 이들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위로와 오락이 바로 드라마이기에, 최소한 그 가상의 세계 안에서만이라도 평범한 장삼이사들을 위한 정의가 구현되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 하루에 2시간도 눈을 못 붙인 채 일터로 끌려 나가고, 어지럼증을 호소하다가 쓰러져서 119에 실려가고, 심지어 죽고 난 뒤에도 과로사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드라마 속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불의를 실천하는 중인데 말이다.

나는 이제 이런 글을 쓰는 게 지겹다. 비슷한 주제의 글을 이 지면에도 몇차례 썼고 다른 매체에도 몇차례 썼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20시간 넘게 촬영을 하고 2~3시간가량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촬영 현장으로 나가는 ‘디졸브 촬영’ 사례를 고발하는 목소리는 드라마 제목만 바꿔가며 하루가 멀다 하고 튀어나왔다. 스태프가 다치거나 쓰러지면 방송사는 제작사에 책임을 떠넘겼고, 제작사는 턴키 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외치길 반복했다. 상황이 바뀌질 않으니, 상황을 다루는 글이라고 바뀔 리가 없다.

방송사들이 밀집해 있는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를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저 화려한 방송사 건물들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태프가 착취당했을까? 자신들이 ‘문화를 제일 잘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시청자들에게 ‘다채로운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새로움을 항해’하며 ‘함께 만드는 즐거움’을 쌓아가고 있다고 외치는 거창한 슬로건은 얼마나 많은 방송노동자의 피를 밟고 서 있는 걸까? 2018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2019년의 방송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한가지다. 문화를 통한 새로움과 즐거움을 논하기 전에, 새해에는 제발 아무도 죽이지 말아달라고.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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