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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자, 한지민 주연의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여성 배우들이 주연인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와 노년의 문제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져 방영 내내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제이티비시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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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2019 대중문화계 ‘빛과 그림자’
남성 연예인들의 잇따른 성추문
언론계 대화방, 불법촬영물 공유
‘보니!하니!’ 폭행 논란까지
‘벌새’ 김보라 등 여성 감독 주목
여성 주연 영화·드라마·코미디 풍성
‘더 안전하고 공정한 일터’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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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자, 한지민 주연의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여성 배우들이 주연인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와 노년의 문제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져 방영 내내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제이티비시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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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연말은 회한과 후회로 가득한 시기다. 연초에 세운 계획들은 십중팔구 미완이거나 어그러져 있고, 돌아보면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들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2019년은 여러모로 암담하고 쓸쓸하다. 대중문화계는 더더욱 그렇다.
돌아보면 아찔하다. 연초부터 가수 승리의 성매매 알선 및 성매수, 가수 정준영과 최종훈의 성폭력 및 불법촬영 동영상 유포,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 전 대표 프로듀서 양현석의 국외 성매매 알선 등의 의혹이 터져 나왔다. 여름에는 배우 강지환의 성폭력 의혹이, 연말에는 가수 김건모의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승리와 양현석의 성매매 알선 혐의는 수사기관을 거쳐 가며 유야무야 무혐의 처분이 났고, 정준영과 최종훈은 징역형이 선고된 1심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강지환은 피해자와 합의 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승리와 김건모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날개를 달아준 문화방송(MBC) <나 혼자 산다>와 에스비에스(SBS) <미운우리새끼>는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논평 없이 방송을 계속하는 중이고, 정준영의 하차와 멤버들의 내기 골프 논란 직후 잠정 폐지되었던 한국방송(KBS) <해피선데이―1박2일>은 시즌4로 돌아왔다.
언론이라고 다를까. 일부 언론은 김건모 성폭력 의혹을 제기한 피해 호소인이 유흥업계 종사자라는 이유로 그게 어떻게 성폭력이 되느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유흥업계 종사자는 성을 판매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니, 동의 없는 일방적인 신체 접촉을 하더라도 성폭력이 아니’라는 논리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 운동단체 ‘디지털 성범죄 아웃’(DSO)이 입수해 공개한 언론계 익명 단체대화방 대화 기록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남자 기자들로 가득한 그 방 안에서는 각종 불법촬영 동영상이 공유되고 성매매 업소 정보들이 유통됐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남성을 향한 공범의식으로 뭉친 남성연대는 아직 이처럼 견고하다.
떠난 사람, 남은 사람
그러는 동안 여자들이 죽었다. 자신을 틀 안에 가두려는 세간의 폭력에 맞서 끊임없이 발언해온 가수 겸 배우 설리가 세상을 떠났고, 민감한 사생활이 담긴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며 소송을 진행했던 가수 구하라는 재판부의 2차 가해를 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느꼈을 절망을 함부로 지레짐작하는 것은 위험하고 무례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일련의 일들이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건 더 둔감하고 악의적인 일이다. 죄를 지은 이들은 당당한데 죄 없는 이들은 세상을 떠났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무고한 이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참담함에 휩싸여 연말을 보낸다.
아까운 생명을 잃어야 사태의 무게를 실감하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반복해야 할까? 교육방송(EBS) <생방송 보니!하니!>에서 하니 역을 맡고 있는 김채연을 상대로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는 지적을 받은 코미디언 최영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억울하다고 주장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채연이) 자기 때문에 내가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 같아 미안하다며 울더라”는 식의 진술로 김채연을 방패 삼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피해자의 발언권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대신 행사한다는 점도 문제지만, 불특정 다수를 향해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에 대한 추가질의 없이 그의 주장을 고스란히 보도한 기자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자격 미달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더 큰 문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해도 될까. 환멸과 비극 앞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부적절한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에겐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절망과 상실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조명받아 마땅한 성취들을 잊고 지나가면 안 된다. 수많은 퇴보와 백래시 속에서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 흔적들을 기억해야, 싸우면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계속 싸울 것 아닌가.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2019년의 성취들을 기리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9년은 여성 영화가 약진한 한해였다. 독립영화계에서는 전세계 44관왕이라는 기념비적인 역사를 쓴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비롯해 이옥섭 감독의 <메기>, <우리들>에 이어 ‘윤가은 유니버스’를 창조해낸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감각적이고 명상적인 공포영화로 첫 장편 데뷔를 한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여성의 욕망과 육체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한가람 감독의 <아워바디> 같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 감독뿐 아니라 남성 감독들 또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흐름에 동참했는데, 임대형 감독의 두번째 장편 <윤희에게>는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 안에서 고통받던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를 다룬 작품이었다.
상업영화계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이어졌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고아성, 김새벽, 정하담 등 대표적인 젊은 여성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유관순을 비롯한 당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받아 마땅한 경의를 바치는 작품이었다. 라미란과 이성경, 최수영 주연의 영화 <걸캅스>는 영화를 둘러싼 논란과 일부 남성 네티즌들의 조롱에도 손익분기를 돌파하며 여성 주연의 액션 오락영화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엑시트>는 조정석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 용남과 임윤아가 연기한 여자 주인공 의주가 대등한 분량을 나눠 가져갔는데, 재난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의 안전을 먼저 챙기고 자력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주체적인 인물 의주를 향한 사람들의 호평이 줄을 이었다. 제작 전부터 악의적인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국내 관객수 367만명을 돌파하며 끝끝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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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박미선은 여성 진행자로 구성된 시사토크쇼 한국방송(KBS) <거리의 만찬>에서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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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방송인들의 힘
텔레비전에서도 유의미한 변화들이 있었다. 남자들하고만 일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나영석 피디는, 티브이엔(tvN) <삼시세끼>의 새로운 시즌을 배우 염정아와 윤세아, 박소담으로 이루어진 여성 조합으로 구성했다.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엠비시 <라디오스타>의 네번째 진행자 자리는 개그우먼 안영미에게 돌아갔고, 프로그램 사상 최초 여성 진행자를 목격한 이들은 자연스레 가수 윤종신의 빈자리에 여자가 앉아도 된다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그우먼 박미선은 여성 진행자로만 구성된 시사토크쇼 한국방송 <거리의 만찬>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우리 시대 가장 민감하고 예민한 문제들을 조망하는 최전선을 지키고 있으며, 개그우먼 박나래는 내년 1월 말 정규편성될 케이비에스 코미디쇼 <스탠드업>의 진행자 자리를 굳혔다.
배우 김혜자, 한지민의 투톱 주연작 제이티비시(JTBC) <눈이 부시게>는 인생의 의미와 노년의 문제를 다룬 압도적 걸작이었는데, 여성 주연 작품을 통해서도 인생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 여성들의 일과 욕망을 치열하고 화려하게 그려낸 배우 임수정, 전혜진, 이다희 주연의 드라마 티브이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역시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호모소셜 누아르를 변주하는 전복의 쾌감으로 가득했다.
여성 아이돌들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시작된 음악 전문 채널 엠넷(Mnet)의 음악경연 프로그램 <퀸덤>은 참여한 아이돌 가수들이 승패와 무관하게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내라고 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성장했는데, 특히나 에이오에이(AOA)가 선보인 ‘너나 해’ 무대는 여성 아이돌에 대한 성별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무대로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2017~2018년 무렵 불었던 여성 방송인들의 약진과 성장의 바람이 잠시 지나가고 마는 한철의 유행이 아니었음을, 여성 방송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냈다.
2019년 한국의 대중문화계는 분명 그 병폐와 한계를 드러냈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병폐와 한계 또한 더 안전하고 공정한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있었기에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싸워온 끝에 대중문화계의 기울어진 운동장도 조금이나마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좌절보다는 한발 더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2020년을 맞이하면 어떨까.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2020년을 잘 부탁한다. 나 또한 더 열심히 쓰겠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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