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18 21:18
수정 : 2006.06.0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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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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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헌법적 장치를 둔 것이다.”
지난해 삼성그룹이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공정거래법을 두고 위헌 소송을 냈을 때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종인 의원은 헌법 119조 2항을 들어 삼성의 위헌 주장을 일축했다. 1987년 9차 개헌 때 들어간 “국가는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민주화를 위해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경제 민주화’ 조항이 그것이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1930년대 미국 행정부가 추진한 뉴딜 정책이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반대하는 기업들의 위헌 소송으로 다 뒤집어진 역사적 경험이 있다. 우리 역시 압축성장 과정에서 힘이 세진 재계가 언젠가는 국가의 간섭과 개입에 ‘도전’할 것을 우려해 이 조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87년 개헌’은 직선제 도입과 의회 기능 강화 등 정치적 민주주의와 동시에 경제적 민주주의를 대폭 강화했다. 김 의원의 말처럼 위정자들의 선견지명 때문이 아니라, 당시 봇물처럼 터진 노동자·농민 등 경제적 약자의 기본권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119조 2항은 국가의 시장 개입과 공적 기능에 정당성을 부여한 핵심 조항이다. 국토·자원의 개발(120조), 농자유전 원칙(121조), 농어업·중소기업 육성(122조), 소비자 보호(124조) 등 다른 헌법 조항의 근거이자, 공정거래법, 노동 3법, 소비자보호법, 중소기업육성법 등 많은 관련법의 법률적 뿌리다. 물론 현실은 보수적인 법 해석(토지공개념 위헌 판결이 대표적이다)과 법 집행으로 많이 뒤틀리긴 했지만, ‘사회적 시장경제주의’라고 규정할 만큼 경제 조항만큼은 당시로선 선진적인 틀과 내용을 갖춘 것이다.
재계 처지에선 이 조항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37조), 경영 불간섭(126조), 사유재산권 보장(23조) 조항 등을 들어 끈질기게 위헌 소송을 내지만 번번이 이 조항에 가로막힌 때문이다. 재계의 시각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한다”는 같은 조 1항이 우리 경제의 기본 원리이고, 2항은 이를 보완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상속세 논란도 마찬가지다. 재계는 현행 상속·증여세법의 포괄주의 원칙과 높은 세율은 과도한 재산권 침해라며 위헌 목소리를 높인다.
민주주의나 시장경제 앞에 꼭 ‘자유’란 말을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학자와 언론, 기득권 단체들도 시비를 건다. 투자든 일자리든 정부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게 신념이어서, 국가가 ‘시장과 재산권’을 제한하는 일체의 행위에는 원초적인 적대감을 보인다. 이들이 출자총액 제한제도 등 기업 규제정책뿐 아니라 종합부동산세, 개정 사립학교법에까지 일관되게 쌍심지를 켜는 이유다.
지방선거가 끝나면 좋든 싫든 개헌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재계와 기득권층은 벌써부터 헌법의 경제 조항을 폐지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87년보다 훨씬 보수화됐다. 정치권은 권력 구조와 대통령 임기 말고는 별 관심이 없고, 개혁적이라는 젊은 의원들은 재벌 연구소와 교감하며 ‘자본의 세례’에 흠뻑 젖어 있는 게 현실이다. 시민사회에선 기본권 강화와 토지공개념 도입을 주장하며 맞불을 놓겠다지만 잘 될지 걱정스럽다. 자본과 시장의 거친 공세로부터 ‘경제 민주화’ 조항을 지켜내는 것조차 힘에 부쳐 보이니 말이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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