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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2.02 20:30 수정 : 2016.02.03 09:38

미국 대선전의 개막을 알리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테드 크루즈와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1, 2위를 기록한 건 상징적이다. 주류의 지지를 받는 3위 마코 루비오와 격차가 크지는 않지만, 공화당의 가파른 우경화를 드러내는 징표인 건 분명하다. 극우 성향에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을 일삼아온 트럼프의 선전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엔 거의 재앙에 가깝다. 테드 크루즈는 트럼프처럼 천방지축은 아니지만 극우 성향 단체인 티파티의 전폭 지지를 받고 있다. 어쩌다 미국 보수의 주류를 자처해온 공화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의 저자 이매뉴얼 패스트라이시 경희대 교수는 트럼프와 크루즈의 부상을 “끔찍하다”면서도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건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1990년 후반의 미국 정치, 그리고 2001년 9·11 테러와 조지 부시 정권의 대응이 트럼프를 키웠다”고 말했다. 50대 초반인 패스트라이시 교수는 “지금 미국은 내가 어렸을 적의 그 미국이 아니다. 외국인들은 잘 느끼지 못했겠지만, 미국의 변화는 오래전에 이미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조지 부시 정권 8년 동안에, 지난 수십년간 세계에 전파해온 ‘미국의 가치’는 뚜렷하게 퇴색했다. 테러정보 수집을 이유로 연방수사국(FBI)은 시민들의 전화와 이메일을 무차별 도청했고, 테러 용의자들은 재판 없이 군 기지에 갇혀 기약 없는 나날을 가혹 행위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감시와 도청, 불법구금과 고문의 위협에 가장 먼저 노출된 이들은 미국 내 아랍계와 무슬림들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비상식적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데도 높은 지지를 받는 데엔, 시민권 후퇴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이런 경험이 짙게 깔려 있다.

정작 조지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주류는 “우리는 이슬람 전체를 적으로 돌리진 않았다”고 펄쩍 뛴다. 하지만 트럼프와 크루즈에게 열광하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지지자를 양산해낸 건 부시 8년간의 집권 경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개방과 포용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미국의 가치’,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은 이미 부시 시대에 현저히 빛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크루즈와 트럼프의 질주에서, 전세계는 동경보다 조롱과 질시를 받는 아메리칸드림의 끝을 보고 있다. 패스트라이시 교수가 회상하는 ‘어릴 적의 미국’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부시 집권 시절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퇴행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건 ‘애국법’이었다. 한시법인 이 법은 버락 오바마 정권에서 더는 연장되지 못하고 폐지됐다. 요즘 한국에서 유난히 ‘애국심’이 강조되고 이걸 잣대로 모든 사안을 재단하려 드는 건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불길하다. 조지 부시 정권이 그랬듯, 박근혜 정권이 우리 정치와 사회에 끼친 영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거란 예감 때문이다.

박찬수 논설위원
부시 재임 시절에 외교전문가 이보 달더가 쓴 책의 이름이 <고삐 풀린 미국>(America Unbound)이었는데, 현 정권의 행동이 꼭 그렇다. 그래도 콘크리트 같은 지지층이 있고, 오로지 대통령만 좇는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이 있다. 상식을 벗어난 권력의 집행은 한국 사회에, 그리고 새누리당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래서 십여년 뒤엔 한국에서도 트럼프나 크루즈 같은 극우 정치인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을 보게 될는지 모른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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