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2.25 19:49
수정 : 2016.02.25 19:58
국가정보원을 ‘괴물’로 만들 테러방지법 때문에 온통 뒤숭숭한 이 2월은 법관들에게 이사의 계절이다. 인사 발령에 따라 판사들은 사무실 짐을, 혹은 집 이삿짐까지 옮겨야 한다. 인사야 매년 있는 일이니 번거로움도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올해는 유난히 뒷말이 많고 뒷맛도 나쁘다.
올해 인사에선 처음 승진 대상이 된 사법연수원 23기 판사 9명이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승진의 주역일 것이라던 22기 7명보다 많다. ‘기수 역전’은 매우 이례적이어서 해석이 다양하다. 22기 판사들이 단체로 ‘위’에 밉보인 일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인사권을 쥔 쪽에 가까운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이 장래에 대한 ‘안배’ 차원에서 중용됐다는 분석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기준과 원칙보다 ‘인사권을 쥔 윗선’의 마음이 더 중요했다는 얘기다.
발탁 대상이라는 법원행정처는 구성이 더 단일해졌다. 광주 출신인 법원행정처장을 빼곤 주요 보직에 호남 출신이 거의 없고, 서울대 출신이 아닌 법관도 찾기 어렵다. 법원 안의 ‘하나회’라는 민사판례연구회 출신이 행정처를 다 차지했다는 말도 있다. 다양성의 실종에선 행정처가 대법원보다 더하다.
우려할 일은 더 있다. 몇 년 전 법관 인사 이원화 제도에 따라 고등법원 판사와 지방법원 판사로 진로를 나눈 23기 가운데 고법 판사 2명이 이번에 고법 부장으로 승진했다. 나머지 고법 판사들은 승진에서 빠졌다. 애초 법관 인사 이원화에선 고법 부장 승진제도의 폐지가 전제돼 있었다. 판사들이 그렇게 승진과 인사평정의 경쟁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소신 있는 판결을 내놓는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런 상태가 굳어지면 ‘통제’가 안 되는 탓일까. 판사들을 승진과 탈락으로 나눈 이번 인사는 법관 인사 이원화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메시지가 된다. 당근과 채찍인 승진제도도 그대로 유지된다. 고법 부장 승진제도는 2009년 법관의 독립성 강화 차원에서 폐지하기로 했지만, 폐지 시점이 2015년에서 2017년으로 늦춰지더니 이젠 아예 없던 일로 되는 모양새다. 법원은 사법개혁 따윈 접고 슬금슬금 과거로 돌아간다.
대법원장은 고법 부장 승진제도를 절대 없애지 못한다고 한 전직 법관이 단언한 바 있다. 인사권 없이는 법원을 장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번 인사가 바로 그런 것이겠다.
그렇게 ‘장악’에 연연하면서 사법부는 망가져 간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에 따라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 대법원은 노동 보호가 우선이어야 할 노동 사건에까지 별 고민 없이 일반 민사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13 대 0의 기울어진 판결을 부끄러움 없이 내놓고, 국가 우선과 국고주의로 일관된 형식적 판결을 양산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위대한 반대자’ 윌리엄 더글러스 같은 이나 그 정신은 찾기 어렵다. 법원 인사는 낡은 편향을 하급법원에 강제하는 장치다.
대법원장에게 독점적 인사권이 주어진 것은 권위주의 시대에 행정권력이 사법부에 과도하게 개입한 데 따른 반작용이었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지금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은 사법부를 과거에 묶어두는 족쇄일 뿐이다. 주요 법치국 어디도 대법원장에게 이런 큰 권한을 준 곳은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권위는 하급법원에 대한 인사권이 없는데도 드높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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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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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대법원장이 권한을 내려놓는 게 먼저다. 애초 약속대로 고법 부장 승진제도를 없애고 인사권을 위원회나 법원장 등에게 분산하는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 지금 제일 나쁜 것은 법원이 과거에 머무는 것이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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