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 가라앉을 것 같던 배는 겨우 균형을 잡았다. 대표직을 내던질 듯했던 김종인씨는 돌아왔고, 비례대표 명단은 몇명을 걸러내고 순번을 조정하는 선에서 타결됐다. 비상대책위원들은 “잘 모시지 못해 송구하다”고 김종인 대표에게 고개를 숙였다. ‘비례대표만 벌써 다섯 번째’라는 비판은 적어도 당내에선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당 대표(정확히는 비상대책위 대표)가 선거 승리를 위해 비례대표 맨 앞에 자신을 배치하겠다고 해도 사실 그걸 비난할 명분은 없다. 선거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비례대표 1번이 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중요한 건 김종인 대표의 순번이 아니다. 비례 명단을 둘러싼 당내 갈등도 아니다. 정당에서 공천 명단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빚은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더불어민주당에서 타협과 봉합으론 감출 수 없는 게 있다. 당원과 지지자들의 마음에 남은 상처다. 비례 갈등 와중에 공개된 김종인 대표 발언은 제1야당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내가 무슨 이거(비대위 대표) 하고 싶다고 했나? 자기들이 낭떠러지에 떨어지려고 하니 비대위를 만들어 놓고…, 내가 딱 던져버리고 나오면 이 당이 잘될 거 같아?”
‘나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지 말라’고 김 대표는 말했지만, 정작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건 당원과 선거에서 제1야당을 찍은 지지자들이다. 박근혜 후보 참모였던 사람을 야당 대표로 모시고 온 건 당원과 지지자들이 아니다. 그래도 야당이 분열되고 워낙 어려우니까 김 대표가 잘해주길 기대했던 게 또한 그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얘기까지 들어야 하는 심경은 어떨지, 김종인 대표는 한 번이라도 헤아려 봤는가.
물론 삼고초려를 하듯이 불러놓고 박대하는 듯한 분위기에 김 대표는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문재인 전 대표나 비상대책위원들에게 따지면 될 일이다. 공개적으로 ‘이따위 당…’을 언급하며 당원 전체를 모욕할 일은 아니다. 야당이 낭떠러지에 선 책임은 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이 감당할 몫이다. 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그 당에 한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대중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김 대표의 인식은 비례대표 2번을 고집하는 논리에서도 묻어난다. 그는 당 대표가 비례 후순위에 포진함으로써 지지자를 결집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렇게 답했다. “13대 국회 때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내가 대통령 떨어지고 국회의원이라도 해야겠는데 돈이 없어서 앞번호를 못 받고 12번 받았다. 여러분이 안 찍어주면 나는 국회도 못 간다’고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론 정치를 못 한다.” 한마디로 김대중 총재처럼 ‘비례대표 번호를 내걸고 표를 구걸하는 앵벌이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김대중 총재 전술을 호남 지역 정서를 최대한 자극하는 ‘앵벌이 정치’라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때 평민당에 투표한 수백만명의 유권자가 모두 그런 ‘앵벌이’에 속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한 표엔 고단한 삶을 누가 좀 더 피게 해줄지, 정치인 김대중은 그런 노선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민주화를 위한 가장 적절한 선택은 무엇인지 등등 다양한 평가와 고민이 담겨 있었다. 4·13 총선에서 한 표를 던질 시민들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다. ‘이따위로 나를 대접할 수 있느냐’고 호통치는 대표를 보면서 유권자들이 제1야당에 표를 던져야 할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박찬수 논설위원
김 대표는 야당을 ‘수권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비례대표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권 야당’은 김 대표 머릿속이 아니라 대중과의 교감에서 탄생한다. 열린 마음으로 지지자들에게 다가서지 않으면 김종인 대표의 정치적 미래는 없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관련 영상] ‘구원 투수’ 김종인, 대선까지 더민주와 더불어?/ 더정치 #14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