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4.14 20:02 수정 : 2016.04.14 20:02

19세기는 ‘민란’의 시대였다. 1811년 12월 홍경래가 이끄는 농민군은 평안도 가산에서 봉기해 정주성을 4개월 가까이 점령한 채 관군과 맞섰다. 홍경래는 전사했으나, 농민들의 마음속에는 계속 살아 있었다. 1862년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이 진주를 거쳐 전라도와 충청도, 제주도를 휩쓸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봉기의 절정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전라도를 장악하고 집강소를 설치해 직접 개혁정치를 했다. 하지만 경복궁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뒤 세력을 총동원해 맞붙었다가 패했다. 조선은 이때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웅적 싸움이었다고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뒤따른 비극이 너무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홍경래의 정주성이 함락된 뒤 2983명이 체포됐는데, 조선 조정은 10살 이하의 소년과 여자를 뺀 1917명을 참수했다. 동학농민군이 패한 뒤, 일본군은 3만~5만명의 농민군을 학살했다. 당시 일본군 병사가 남겨 2013년 세상에 알려진 일기에는 “(나주 남문 바깥 작은 산에) 주검들이 쌓여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 버린 주검이 680명에 달했다.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고 했다.

정치를 독점한 양반·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을 제쳐놓고 각자 자신들의 몫을 챙기느라 이전투구를 벌인 것이 파국으로 이어졌다. 정당성을 잃을 때, 국가는 ‘세금이라는 형태로 도둑질을 독점하고 합리화한 강도’(미국 경제학자 맨서 올슨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민주정치는 그런 파국을 피하려고 주기적인 선거로 대표자를 뽑는다.

20대 총선이 끝났다. 새누리당이 2당으로 밀려나는 참패를 한 것을 두고 ‘선거 혁명’이란 표현까지 나온다. 하지만 선거제도와 선거구 획정 방식 등에 따라 변화 여지가 큰 의석수만 갖고 총선 결과를 아전인수로 해석해선 안 된다. 예컨대 더불어민주당은 서울에서 49석 가운데 35석(71.4%)을 차지했는데, 득표율은 42.4%로 36.2%인 새누리당보다 6.2%포인트 높았을 뿐이다.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적어도 이번 총선의 서울과 수도권에 한정해 보면 더불어민주당이 수혜자가 됐다.

정국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선거였음에도 투표율이 58%에 머물렀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18대 총선의 46.1%, 19대 총선의 54.2%보다는 조금 높았지만, 열에 넷이나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1981년부터 20세기에 치러진 다섯 차례의 총선 평균 투표율은 75%였다. 지금의 의회정치로는 내가 투표장에 가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정치의 실패’가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는 20세기 후반 기적 같은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주의를 성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장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분배도 공정함과 거리가 아주 멀다. 다른 사람의 것을 뺏는 것이 부자가 되기 쉬운 사회는 성장하기 어렵다. 19세기 민란의 시대가 그러했다. 그때와 방식은 다르겠지만, 민란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남구 논설위원
방송사 출구조사를 분석해 보면 이번 총선에서 20대와 30대 투표율이 19대 때보다 크게 올라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앞으로 정치가 젊은이들의 삶을 바꿔놓지 못한다면 그들은 강한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이번에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음에는 투표장으로 불러낼 수 있는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정치세력에게 이 나라의 앞날이 달렸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아침햇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