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07 20:20
수정 : 2016.06.07 20:20
이마누엘 칸트는 도덕 철학의 기초를 세우는 작업(<윤리 형이상학의 정초>)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한다. “너는 너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인간을 목적으로,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이다. 칸트의 이 명령은 오늘의 문명 세계를 떠받치는 원리이자 이 원리를 집약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 명령에 따라 실현된 나라를 칸트는 ‘목적의 나라’라고 부른다. 모든 인간이 서로를 목적으로, 존엄한 인격으로 만나는 나라가 ‘목적의 나라’다.
칸트의 이 정언명령은 ‘인간을 어떤 경우에도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칸트는 인간이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목적의 나라’는 목적들로만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다. 이 복잡한 세계에서 우리는 타인의 힘에 기대지 않고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삼아 이 세계는 돌아간다. 칸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을 수단으로만 삼아서는 안 되며,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과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을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한다. 인간의 노동력은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이어서, 시장가격에 따라 다른 노동력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인격의 존엄성은 가격을 매길 수 없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 우리는 노동력을 수단으로 쓸 수 있으나 인격까지 수단으로 쓸 수는 없다. 인격의 가치는 가격을 무한히 초월한다. 그런데 노동력과 인격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인간 안에 함께 있다. 바로 여기서 인격이 노동력과 하나로 묶여 한갓 수단으로 떨어질 위험이 생겨난다. 칸트가 모든 인격이 존중받는 ‘목적의 나라’를 인류의 이상으로 제시해 특별히 강조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칸트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자. 19살 청년이 지하철 안전문 수리를 하던 중 달려오는 전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청년을 고용한 업체는 2인1조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다. 사고가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사람의 목숨보다 비용 절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면 똑같은 일이 아홉 달 만에 재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살 청년은 한낱 노동력으로, 절감해야 할 비용으로 취급받았다. 그 청년만이 아니다. 위험한 일은 하청에 재하청을 거쳐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떠맡겨진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다른 사람들이 부서진 연장을 대신하듯 그 자리에 들어선다. 사람이 인격 없는 도구가 된다. 비슷한 일이 구조조정이라는 더 큰 사태에서는 더 큰 규모로 벌어진다. 구조조정은 산업의 측면에서 보면 구조의 효율적 재편이지만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집단해고·대량실업이다. 이 나라처럼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곳에서 실업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이 어른거리는 숨 막히는 터널에 떠밀리는 일이다. 대책 없는 구조조정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거두어갔는지 우리는 2009년 쌍용차 해고 사태에서 보았다. 이대로 가면 그런 일이 다시, 더 격하게 일어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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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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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목적은 ‘목적의 나라’를 이루는 데 있다. 인간이 그저 수단으로 쓰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인격으로 존중받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부의 할 일이다. 그 할 일을 하지 않는 정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 다 쓴 부품처럼 버려지고, 버려진 뒤에 어떻게 되는지 관심도 두지 않는 나라는 나라로서 자격이 없다.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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