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내가 죽든가, 국회의장이 물러나든가 둘 중 하나”를 선언하고 단식에 들어갔을 때, 코에 튜브를 꽂은 한 인도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롬 샤르밀라. 2000년 11월2일 인도 동북부 마니푸르주의 말롬이란 마을에서 인도군이 버스 정류장에 있던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어린이를 포함해 죄 없는 민간인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분리파와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동북부 7개 주에는 군사특별권한법에 따라 군인들에게 면책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선 군인들이 민간인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성폭행하는 일이 잦았다. 사흘 뒤 샤르밀라는 이 법이 폐지될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머리를 빗지도, 거울을 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인도 정부는 자살기도죄로 그를 체포하고, 코에 튜브를 끼워 강제로 영양을 공급했다. 1년의 형기가 끝나면 다시 체포해 가두기를 14차례나 반복했다. 지난 8월9일 샤르밀라는 15년 9개월간 계속해온 단식을 멈췄다. 홀로 하는 싸움 대신, 이제 주의회 선거에 나가 민주적으로 싸우겠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꿀 한 방울을 찍어 혀에 대며 눈물을 흘리던 샤르밀라에게 기자가 소감을 물었다.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샤르밀라를 ‘철의 여인’이라 했지만,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그가 친구들에게 한 말을 이렇게 전했다. “나는 보통의 바람을 가진 보통 여자다.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아, 사람아…. 이란에서 태어나 자란 레이하네 자바리는 2014년 10월25일 스물여섯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교수형이었다. 스스로 돌아보기를, ‘모기 한 마리 죽인 일이 없고, 바퀴벌레도 (죽이지 못하고) 집어서 밖으로 내던지는 게 고작’이었던 그는 열아홉살이던 2007년 어느 날 밤 한 남자의 등을 흉기로 찔렀다. 남자는 전직 정보기관원이었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자바리는 그 남자의 사무실 담당으로 일했다. 남자는 죽었고, 자바리는 체포됐다. 자바리는 성폭행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 남자를 찌른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집에 다른 사람이 1명 더 있었고 그가 살해범이라고 했다. 자바리는 2개월간 가족이나 변호인 접견을 금지당했고, 고문당했다. 수사기관은 제3의 인물에 대해선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 사용한 흉기가 사건 이틀 전 자바리가 산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법원은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인권단체의 구명운동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와 한 시간 짧은 면회 뒤 형이 집행됐다. 그해 4월 사형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모든 장기를 필요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라고 유언한 자바리는 어머니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와서 슬퍼하고 괴로워할 묘지를 만들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고, 내가 고통을 겪는 나날들을 애써 잊고,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세요.” 자바리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사건이 일어난 소름 끼치는 그날 밤 차라리 내가 살해당했다면 좋았겠다”고 자바리는 썼다. 그에겐 자신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보호해주는 국가가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나는 울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걸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법을 믿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이란이란 나라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농민 백남기씨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정부가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초가을 바람이 을씨년스럽다. 자바리처럼 지금 나도, 나라 잃은 백성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jeje@hani.co.kr
칼럼 |
[아침 햇발] 밥, 목숨을 모욕하는 세상 / 정남구 |
논설위원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내가 죽든가, 국회의장이 물러나든가 둘 중 하나”를 선언하고 단식에 들어갔을 때, 코에 튜브를 꽂은 한 인도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롬 샤르밀라. 2000년 11월2일 인도 동북부 마니푸르주의 말롬이란 마을에서 인도군이 버스 정류장에 있던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어린이를 포함해 죄 없는 민간인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분리파와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동북부 7개 주에는 군사특별권한법에 따라 군인들에게 면책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선 군인들이 민간인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성폭행하는 일이 잦았다. 사흘 뒤 샤르밀라는 이 법이 폐지될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머리를 빗지도, 거울을 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인도 정부는 자살기도죄로 그를 체포하고, 코에 튜브를 끼워 강제로 영양을 공급했다. 1년의 형기가 끝나면 다시 체포해 가두기를 14차례나 반복했다. 지난 8월9일 샤르밀라는 15년 9개월간 계속해온 단식을 멈췄다. 홀로 하는 싸움 대신, 이제 주의회 선거에 나가 민주적으로 싸우겠다고 했다. 손가락으로 꿀 한 방울을 찍어 혀에 대며 눈물을 흘리던 샤르밀라에게 기자가 소감을 물었다.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샤르밀라를 ‘철의 여인’이라 했지만,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그가 친구들에게 한 말을 이렇게 전했다. “나는 보통의 바람을 가진 보통 여자다.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아, 사람아…. 이란에서 태어나 자란 레이하네 자바리는 2014년 10월25일 스물여섯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교수형이었다. 스스로 돌아보기를, ‘모기 한 마리 죽인 일이 없고, 바퀴벌레도 (죽이지 못하고) 집어서 밖으로 내던지는 게 고작’이었던 그는 열아홉살이던 2007년 어느 날 밤 한 남자의 등을 흉기로 찔렀다. 남자는 전직 정보기관원이었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자바리는 그 남자의 사무실 담당으로 일했다. 남자는 죽었고, 자바리는 체포됐다. 자바리는 성폭행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 남자를 찌른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집에 다른 사람이 1명 더 있었고 그가 살해범이라고 했다. 자바리는 2개월간 가족이나 변호인 접견을 금지당했고, 고문당했다. 수사기관은 제3의 인물에 대해선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 사용한 흉기가 사건 이틀 전 자바리가 산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법원은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인권단체의 구명운동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와 한 시간 짧은 면회 뒤 형이 집행됐다. 그해 4월 사형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모든 장기를 필요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라고 유언한 자바리는 어머니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와서 슬퍼하고 괴로워할 묘지를 만들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고, 내가 고통을 겪는 나날들을 애써 잊고,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세요.” 자바리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사건이 일어난 소름 끼치는 그날 밤 차라리 내가 살해당했다면 좋았겠다”고 자바리는 썼다. 그에겐 자신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보호해주는 국가가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나는 울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걸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법을 믿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이란이란 나라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농민 백남기씨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정부가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초가을 바람이 을씨년스럽다. 자바리처럼 지금 나도, 나라 잃은 백성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jeje@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