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때로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강력하게 정신과 행동을 지배한다. 지금 청와대 관저를 걸어 잠그고 국민에게 맞서 항전하고 있는 대통령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필름을 과거로 돌려보자. 박근혜는 10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27살 때까지 18년을 살았다. 자아가 형성되고 확고해지는 결정적인 시기를 권부의 한가운데서 ‘공주’로 지냈다. 22살 때부터 5년 동안은 절대권력자의 퍼스트레이디 노릇까지 했다. 박근혜에게 청와대는 어린 시절 뛰놀던 집이고 젊은 날의 영광이 깃든 마음의 고향이다. 아버지의 난데없는 죽음으로 그 고향을 떠나 바깥에서 보낸 세월은 박근혜의 의식 속에선 풍찬노숙의 타향살이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돼 34년 만에 청와대로 들어간 것은 꿈에도 그리던 집에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청와대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되찾은 집이다. ‘어떻게 찾은 집인데 나한테 나가라 마라야’ 하는 마음이 지금 박근혜의 마음 아니겠는가. 더 들어가 보면 박근혜에겐 청와대가 자기 집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자기 집이다. 박근혜의 환상 속에서 이 나라는 아버지 박정희가 세우고 키운 나라, 박정희의 나라다. “저는 외환위기 사태를 당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망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있어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박근혜가 1998년 정치에 뛰어들고서 한 말이다. 이 나라는 아버지가 만든 나라이며 박정희야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드러나 있다. 피와 땀을 흘려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진짜 주역인 국민은 박근혜의 안중에 눈곱만큼도 없다. 국민은 아버지의 시혜를 받은 백성, 피지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유신독재의 폭정도 떼쓰는 백성에게 들이댄 엄한 아버지의 회초리였을 뿐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아버지의 업적 위에 서 있다는 것이 박근혜의 의식 저층에 깔린 믿음이다. 이 나라 현대사는 아버지의 역사다. 바로 그 아버지의 역사와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은 사람, 말하자면 ‘장자상속권’을 쥔 사람이 바로 박근혜 자신이다. 이 상속권에 따라 아버지의 나라는 박근혜의 나라가 된다. 박근혜의 눈으로 보면, 재벌도 아버지가 만들어 키운 것이고 아버지가 이룬 업적의 한갓 수혜자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재벌들이 가진 돈을 좀 가져다 쓴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어차피 재벌도 내가 소유한 이 나라의 일부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마음에 미르재단 따위를 만들어 돈을 갈취한 것이 범죄가 된다는 의식이 있을 턱이 없다. 아버지가 만든 나라의 상속자이자 주인으로서 박근혜는 홀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문고리 3인방은 말할 것도 없고 수족처럼 부린 안종범·우병우도 미천한 아랫것들일 뿐이다. 국무총리조차도 ‘문자로 면직 통고를 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시사저널>이 보도한 김종필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한마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야.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이야.” 박근혜는 반성할 줄 모른다. 위기에 몰리면 가짜 눈물을 흘리거나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는 척하지만, 조금만 국면이 느슨해지면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간다. 시인 김수영이 <절망>이라는 시에서 말한 대로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통치를 더 견디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자존을 모독하는 짓이다. 독재자는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 국민이 들고일어나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무릎 꿇게 하는 수밖에 없다. michael@hani.co.kr
칼럼 |
[아침 햇발] 박근혜 정신분석 / 고명섭 |
논설위원 때로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강력하게 정신과 행동을 지배한다. 지금 청와대 관저를 걸어 잠그고 국민에게 맞서 항전하고 있는 대통령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필름을 과거로 돌려보자. 박근혜는 10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27살 때까지 18년을 살았다. 자아가 형성되고 확고해지는 결정적인 시기를 권부의 한가운데서 ‘공주’로 지냈다. 22살 때부터 5년 동안은 절대권력자의 퍼스트레이디 노릇까지 했다. 박근혜에게 청와대는 어린 시절 뛰놀던 집이고 젊은 날의 영광이 깃든 마음의 고향이다. 아버지의 난데없는 죽음으로 그 고향을 떠나 바깥에서 보낸 세월은 박근혜의 의식 속에선 풍찬노숙의 타향살이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돼 34년 만에 청와대로 들어간 것은 꿈에도 그리던 집에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청와대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되찾은 집이다. ‘어떻게 찾은 집인데 나한테 나가라 마라야’ 하는 마음이 지금 박근혜의 마음 아니겠는가. 더 들어가 보면 박근혜에겐 청와대가 자기 집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자기 집이다. 박근혜의 환상 속에서 이 나라는 아버지 박정희가 세우고 키운 나라, 박정희의 나라다. “저는 외환위기 사태를 당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망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있어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박근혜가 1998년 정치에 뛰어들고서 한 말이다. 이 나라는 아버지가 만든 나라이며 박정희야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드러나 있다. 피와 땀을 흘려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진짜 주역인 국민은 박근혜의 안중에 눈곱만큼도 없다. 국민은 아버지의 시혜를 받은 백성, 피지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유신독재의 폭정도 떼쓰는 백성에게 들이댄 엄한 아버지의 회초리였을 뿐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아버지의 업적 위에 서 있다는 것이 박근혜의 의식 저층에 깔린 믿음이다. 이 나라 현대사는 아버지의 역사다. 바로 그 아버지의 역사와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은 사람, 말하자면 ‘장자상속권’을 쥔 사람이 바로 박근혜 자신이다. 이 상속권에 따라 아버지의 나라는 박근혜의 나라가 된다. 박근혜의 눈으로 보면, 재벌도 아버지가 만들어 키운 것이고 아버지가 이룬 업적의 한갓 수혜자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재벌들이 가진 돈을 좀 가져다 쓴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어차피 재벌도 내가 소유한 이 나라의 일부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마음에 미르재단 따위를 만들어 돈을 갈취한 것이 범죄가 된다는 의식이 있을 턱이 없다. 아버지가 만든 나라의 상속자이자 주인으로서 박근혜는 홀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문고리 3인방은 말할 것도 없고 수족처럼 부린 안종범·우병우도 미천한 아랫것들일 뿐이다. 국무총리조차도 ‘문자로 면직 통고를 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시사저널>이 보도한 김종필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한마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야.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이야.” 박근혜는 반성할 줄 모른다. 위기에 몰리면 가짜 눈물을 흘리거나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는 척하지만, 조금만 국면이 느슨해지면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간다. 시인 김수영이 <절망>이라는 시에서 말한 대로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통치를 더 견디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자존을 모독하는 짓이다. 독재자는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 국민이 들고일어나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무릎 꿇게 하는 수밖에 없다. michael@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