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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28 17:16 수정 : 2017.03.28 18:59

고명섭
논설위원

중국의 현대 철학자 리쩌허우의 대담집(<중국 철학은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구절을 만나게 된다. <서유기> 삼장법사의 모델이 된 당나라 승려 현장이 불법을 구하러 인도(천축)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현장은 인도인들에게 중국에도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노자>(도덕경)를 짐 꾸러미에 함께 넣어 험로를 넘었다. <노자> 정도면 인도에서도 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축에 도착한 현장은 인도 사상의 거대함과 정밀함에 주눅이 들어 <노자>를 끝내 보여주지 못했다. 중국 사상의 최고봉이라는 <노자>도 인도 불교가 세운 ‘중론’이나 ‘유식’ 앞에서는 소박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현장은 산스크리트 문헌 수천 권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중국 지식인들은 500년 뒤 주희의 신유학에 이르러서야 인도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문화에는 나름의 법칙이 있어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문화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지난 세기 내내 물질문화든 정신문화든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이기만 했다. 과학기술과 근대학문이 밀려들었고 민주주의 정치모델이 도래했다. 우리 현대사 70년은 서구가 도달한 높이와 우리가 처한 현실 사이의 격차 앞에서 겪은 낙담의 시간이었다. 그러다 어둠이 가장 깊어진 순간에 촛불이 타올랐다. 지난 다섯달 동안 광장의 촛불이 이루어낸 시민혁명은 지난 세월의 열패감을 일거에 떨쳐버렸다. 현직 대통령 파면이 결정된 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국인들이 부끄러움을 자랑스러움으로 바꾸었으며,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이때에 촛불을 든 대중이 이룬 한국 민주주의가 드넓은 지역에 깊은 의미를 준다고 썼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논평이 아니더라도, 오직 촛불의 힘으로 이루어낸 이 영예로운 혁명은 민주주의 실천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임이 틀림없다. 민주주의, 곧 데모크라시가 ‘시민(데모스)의 통치(크라티아)’를 뜻하는 말임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조금 더 들어가면 ‘크라티아’는 어원상 ‘크라토스’(힘, 권력)와 통한다. 데모크라시는 그러므로 시민의 통치이기 이전에 시민의 힘, 시민의 권력이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진 빚 1억원을 갚아주자는 운동이 벌어지자 단숨에 12억원이 모인 것은 시민의 권력의지와 참여의식이 얼마나 강렬한지 증언하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후원금을 낸 무명의 시민이 남긴 “민주주의 및 시민권력 확인료”라는 메시지는 데모크라시의 본뜻을 명료하게 알려준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권력이며 시민의 통치다. 촛불혁명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계속된 민주주의 후퇴를 일거에 만회한 데서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본질을 집합적 힘으로 드러내는 차원으로까지 다가간 것이다.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혁명은 두번째 혁명을 잉태하고 출산한다. 프랑스혁명이 그랬고 러시아혁명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두번째 혁명이 태아 상태에서 또는 출산 직후에 사멸하고 만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 현대사만 봐도 4·19혁명은 좌절로 끝났고 6월항쟁은 미완에 그쳤다. 리쩌허우는 다른 대담집(<중국 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에서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이상 사회’를 요구하지 말고 ‘사회의 이상’을 요구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사회의 이상을 향해 분투해야 합니다.” 광장의 촛불이 밝힌, 우리 앞에 놓인 목표와 이상을 향해 침착하고도 집요하게 나아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올라온 세월호가 육지를 향해 항진하듯이.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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