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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20 17:49 수정 : 2017.04.21 00:32

백기철
논설위원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세월호였다. 304명 원혼들의 몸부림이었을까? 박근혜의 파면과 구속은 그 통한의 7시간으로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그날 이후 진실을 밝히기 위한 긴 여정도 시작됐다.

7시간을 두드리다 2014년 여름께 세월호 참사의 초점은 박근혜의 7시간으로 모아졌다. 보톡스설, 호텔 마사지설, 정윤회 밀회설, 굿판설, 늦잠설까지 온갖 설이 제기됐다. <한겨레>는 석진환 김원철 하어영 김외현 기자 등으로 ‘7시간팀’을 꾸렸다. 7시간은 참사의 책임 유무를 넘어 언론이 권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느냐는 근본적 문제와 관련된 주제였다.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 의사들을 뒤지고, 용하다는 점집도 훑었지만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

게이트의 서막, “나쁜 사람들” 2014년 하반기 ‘7시간팀’은 우여곡절 끝에 내부고발성 증언을 확보했다. 박근혜가 승마협회를 조사한 문체부 국장·과장을 콕 찍어 “나쁜 사람들”이라며 자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서슬 퍼런 집권 2년차였지만, 불의한 권력을 고발하는 목소리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해 12월 <한겨레>는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이를 보도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하기 2년여 전 그 서막을 여는 기사였다.

꼭꼭 숨는 최순실 파면 팔수록 최순실이 실세라는 심증이 굳어졌지만 팩트가 나오지 않았다. 검찰은 <세계일보>가 보도한 정윤회 문건 의혹을 덮기 급급했다. ‘7시간팀’은 2015년 1월 ‘승마선수 정○○이 박근혜 덕을 본다고?’란 제목의 의혹 정리성 기사를 내보내는 데 그쳤다. 박근혜에겐 그때가 기회였다. 국정농단의 일단이 드러난 만큼 과감히 정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브레이크 없는 권력은 멈추지 않았다. 6개월 뒤 2015년 7월 최순실은 삼성 사람을 독일로 불러 승마 지원을 압박했다. 그해 하반기부터 재단 사업도 대놓고 추진했다. 언론과 검찰이 무뎌지자 권력이 춤추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흔든 170일 2016년 9월20일 <한겨레> 1면에 최순실이 등장했다. 자기가 다닌 마사지센터 원장을 케이스포츠재단 이사장에 앉혔다는 특종 보도였다. 그해 여름 구성된 ‘미르팀’의 개가였다. 당시 편집국엔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을 파헤쳐야 한다는 정보보고가 잇따랐고, 배후가 최순실이라는 의혹도 커졌다. 김의겸 선임기자를 필두로 류이근 하어영 방준호 기자가 미르팀에 참여했다. 막내인 방 기자의 저인망식 취재에 최순실 쪽 사람이 걸려들었다. 이후 최순실의 광범위한 국정농단 실상은 물론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까지 연일 <한겨레>에 등장했다. ‘7시간팀’에서 시작된 퍼즐 맞추기가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70여일 뒤인 지난달 10일 박근혜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광장의 노래 청와대로 진격하는 촛불의 선두에는 세월호 유족들이 서 있었다. 광장은 세월호에 흐느꼈다. 촛불이 거세질수록 슬픔도 커졌다. 국정농단이 사법적 단죄 대상이라면, 세월호는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 여전히 침전해 있는 아픔이었다. 세월호 7시간에는 뇌물과 직권남용으로 점철된 권력의 방종과 나태와 비겁과 고루함이 모두 녹아 있다.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그리고 문고리 3인방에 이르기까지 박근혜와 그 주변의 모든 농단과 비리의 흔적이 7시간에 응축돼 있다.

언론의 본령은 언제나 ‘권력의 7시간’을 파헤치는 것이다. 박근혜가 구속되는 날 세월호가 뭍으로 돌아오고, 그로부터 한달여 뒤 ‘촛불 대선’이 치러진다. 오롯이 그 바다 앞에 선 심정으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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