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6.13 18:01
수정 : 2017.06.13 19:55
김영희
논설위원
당혹스러웠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그것도 머리에 티아라를 쓴 여주인공이 큰 가슴을 강조하고 허벅지는 다 드러낸 채 뛰어다니는 영화를 보고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원더우먼>에서 아마존 여전사들의 초반 전투 장면부터 울컥했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라는 힘을 가진 여성 영웅이 드디어 주류에 올라선 느낌일까.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개봉 직후 미국 뉴욕의 한 여성작가모임에선 소녀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자는 모금운동이 벌어져 이틀 만에 7천달러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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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더우먼>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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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세기를 말하던 2000년 전후, 한국에선 딸 잘 키우기 붐이 일었다. 남아선호사상과 산아제한정책, 태아성감별 기술의 등장이 겹쳐 기형적인 남초현상을 낳았던 10여년간의 여아낙태 광풍이 사그라든 지 몇 년 뒤였다. 여성단체의 여학생정치체험학교에 지원자가 몰리고 딸 사랑 아빠들의 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커리어우먼’ ‘프로여성’ 같은 말들이 범람하며 여성 리더십 관련 자기계발서가 쏟아진 것도 이즈음이다. 1980년대 20%대이던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90년 30%대, 2000년엔 65%대로 뛰어올라 2009년엔 남성을 추월했다. 이제 성별은 장애가 될 수 없다고, 너만 똑똑하면 된다고 사회는 여성들을 향해 ‘주술’을 걸었다. 십수년이 흘러 그 주술은 ‘사기’라고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때 터져나온 20~30대 여성들의 목소리가 증언했다. 가정과 학교에서 성차별적 교육 내용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면접장에서, 일터에서, 밤길에서 부딪치는 현실은 간극이 너무 컸다.
2017년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논란은 2016년 강남역 사건만큼이나 이들에게 또 하나 결정적인 장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유니세프 대사 같은 셀러브리티로 멋부릴 때가 아니다.” 지난주 “이번엔 국방을 잘 아는 남성” 발언으로 ‘명예남성’ 인증을 남긴 이언주 국민의당 부대변인이 했다는 말이다. 엊그제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했던 민간 연안여객선 선장, 전시 항공모함 함장 운운과 일맥상통한다. 유엔이나 인권외교 무대를 칵테일 마시는 우아한 사교의 장 취급하는 인식 자체도 문제지만, 여성의 역할에 대한 편견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청문회에서 가르치려고 들던 홍문종 자유한국당 의원은 ‘맨스플레인’의 전형적 모습 아닌가. 원유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이라고 가정하고 설득해보라던 것도, 상대가 남성이라면 그런 수준 이하의 상황극을 두번씩 강요할 수 있었을까. 유엔 경험은 의미 없다면서 왜 보수층은 유엔의 대북 제재를 그리 강조해왔는지 모를 일이다.
노르웨이가 공기업 이사회에 여성 40% 할당제를 도입할 때, 당시까지 속도로 계산하면 200년 뒤에야 40%에 이른다는 전망이 나왔다고 한다. 어느 조직이나 인맥·학맥도, 조직 내 경험도 부족한 소수자를 ‘발탁’할 때는 그때까지 걸어온 그의 삶과 인식·철학, 그리고 개혁에 상대적인 장점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강 후보자는 문재인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던 송민순 전 장관이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밀던 공로명 전 장관도 지지한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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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국회에서 열린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모습.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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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사회생활을 시작한 난 여성들이 자리에 오를 때마다 “내가 못하면 여자들이 욕먹을까봐”라고 말하는 걸 숱하게 들었다. 초엘리트로 살아온 강 후보자조차 자리를 잡지 못한 자신을 보며 학업을 포기했던 여학생들 이야기를 꺼내며 결의를 다졌다. 남성들은 절대 하지 않는 이런 말이 사라질 때까지 유리천장을 와르르 무너뜨릴 ‘원더우먼들’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니 굳세어라, 강경화!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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