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돌이켜보면,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만남은 늘 역사적 사건이었다. 2013년 8월28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10대 그룹 총수를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먹었다. 이른바 ‘경제 민주화’ 공약을 앞세워 당선한 대통령이 취임 6개월 만에 사실상 공약을 철회하고, 재계의 민원을 듣는 대전환의 자리였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과 2016년엔 주요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독대를 하기도 했다. 탄핵·파면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통이 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를 표방한 그는 당선인 시절 일찌감치 재벌 총수들을 만났고, 기업인 100명과 24시간 직접 통화가 가능한 ‘핫라인’을 열어줬다.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율을 큰 폭으로 내려, 재벌들에 엄청난 감세 혜택을 안겼다. 2003년 6월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경제5단체장과 재벌 총수 26명을 서울의 한 삼계탕집으로 초청해 점심을 함께했다. 취임한 지 석달이 흐르는 동안 경기부양을 놓고 재계와 빚은 갈등을 푸는 자리였다. 이듬해 9월 러시아 방문 직전에는 15대 그룹 총수를 만나, 투자 활성화를 요청하고 재계의 규제완화 건의를 들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들어 몇몇 재벌 총수와 청와대에서 단독 회동을 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2005년 7월5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시책 점검회의)라는 말로 개혁 추진에 한계를 토로한 건 그 뒤의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곧 재벌 총수들을 만난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방미 때 동행한 경제인들에게 “기업 하는 분들을 가장 먼저 뵙고 싶었다. 돌아가면 다시 제대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고 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이 말을 되짚어 대통령과 총수들 간 회동을 공식 건의하고, 청와대가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만남이 이뤄질 것 같다.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을 당연히 만나야 하는 것일까? 만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만남은 단순히 만나서 밥 먹고 헤어지는 사교활동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담은 사건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역사적 사건은 오직 국민을 위한 것일 때만 정당하다. 대한상의가 대통령을 만나자고 요청하는 것은 한마디로 ‘빚을 갚으라’는 것일 게다. 바로 갚지 않더라도, 빚이 있음을 확인해달라는 것일 게다. 대통령 방미 수행 경제인단은 향후 5년간 128억달러(약 14조6천억원)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것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 빚을 갚는 방식이 ’재벌 개혁’에서 후퇴하는 쪽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문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더는 재벌 총수들을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불온한 독대’는 물론이고, 단체로 만나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 ‘재벌 총수들’은 정부의 정책 파트너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정권이 재계와 협상하고 거래해서 결과가 국민에게 좋았던 적이 있던가. 정책 협의에 필요하다면 경제단체나 기업의 법률적 최고책임자들을 만나면 될 터이다. 그런 일에 대통령까지 나서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재벌개혁과 관련한 사안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주로 다루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3일 4대 그룹 전문경영인들과 만나 정책 방향을 설명하고, 기업 스스로 변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와 기업 간 필요한 소통은 그 선에서 충분히 이뤄질 것이다. 설령 삐거덕거려도 대통령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재벌 개혁 약속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지키는 길이다. jeje@hani.co.kr
칼럼 |
[아침햇발] 대통령이 재벌총수들을 꼭 만나야 하나 |
논설위원 돌이켜보면,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만남은 늘 역사적 사건이었다. 2013년 8월28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10대 그룹 총수를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먹었다. 이른바 ‘경제 민주화’ 공약을 앞세워 당선한 대통령이 취임 6개월 만에 사실상 공약을 철회하고, 재계의 민원을 듣는 대전환의 자리였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과 2016년엔 주요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독대를 하기도 했다. 탄핵·파면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통이 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를 표방한 그는 당선인 시절 일찌감치 재벌 총수들을 만났고, 기업인 100명과 24시간 직접 통화가 가능한 ‘핫라인’을 열어줬다.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율을 큰 폭으로 내려, 재벌들에 엄청난 감세 혜택을 안겼다. 2003년 6월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경제5단체장과 재벌 총수 26명을 서울의 한 삼계탕집으로 초청해 점심을 함께했다. 취임한 지 석달이 흐르는 동안 경기부양을 놓고 재계와 빚은 갈등을 푸는 자리였다. 이듬해 9월 러시아 방문 직전에는 15대 그룹 총수를 만나, 투자 활성화를 요청하고 재계의 규제완화 건의를 들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들어 몇몇 재벌 총수와 청와대에서 단독 회동을 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2005년 7월5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시책 점검회의)라는 말로 개혁 추진에 한계를 토로한 건 그 뒤의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곧 재벌 총수들을 만난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방미 때 동행한 경제인들에게 “기업 하는 분들을 가장 먼저 뵙고 싶었다. 돌아가면 다시 제대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고 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이 말을 되짚어 대통령과 총수들 간 회동을 공식 건의하고, 청와대가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만남이 이뤄질 것 같다.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을 당연히 만나야 하는 것일까? 만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만남은 단순히 만나서 밥 먹고 헤어지는 사교활동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담은 사건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역사적 사건은 오직 국민을 위한 것일 때만 정당하다. 대한상의가 대통령을 만나자고 요청하는 것은 한마디로 ‘빚을 갚으라’는 것일 게다. 바로 갚지 않더라도, 빚이 있음을 확인해달라는 것일 게다. 대통령 방미 수행 경제인단은 향후 5년간 128억달러(약 14조6천억원)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것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 빚을 갚는 방식이 ’재벌 개혁’에서 후퇴하는 쪽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문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더는 재벌 총수들을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불온한 독대’는 물론이고, 단체로 만나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 ‘재벌 총수들’은 정부의 정책 파트너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정권이 재계와 협상하고 거래해서 결과가 국민에게 좋았던 적이 있던가. 정책 협의에 필요하다면 경제단체나 기업의 법률적 최고책임자들을 만나면 될 터이다. 그런 일에 대통령까지 나서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재벌개혁과 관련한 사안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주로 다루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3일 4대 그룹 전문경영인들과 만나 정책 방향을 설명하고, 기업 스스로 변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와 기업 간 필요한 소통은 그 선에서 충분히 이뤄질 것이다. 설령 삐거덕거려도 대통령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재벌 개혁 약속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지키는 길이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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