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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25 18:26 수정 : 2017.07.25 19:07

고명섭
논설위원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즘을 한꺼번에 탄생시킨 곳이다.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이 정치운동들의 탄생 과정은 작용과 반작용의 정치적 역학관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대인이 시민권을 얻었다. 오랫동안 억눌려 살던 유대인은 학문과 산업 분야에 맹렬하게 진출했다. 유대인이 사회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 흐름에 대한 반동, 곧 반유대주의 정치운동이 즉각 나타났다. 1890년대 중반 반유대주의를 전면에 내건 카를 루에거가 빈의 시장으로 선출됐다. 젊은 히틀러는 빈에서 살던 시절에 루에거의 반유대주의 운동에 강한 영향을 받아 후에 나치즘을 일으켰다. 유대인은 독일 문화에 동화하기를 열망했지만, 유대인의 동화 욕구가 커질수록 반유대주의는 강도를 더해갔다.

이 시기에 빈에서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시오니즘을 정치운동으로 조직했다. 헤르츨은 1891년부터 1895년까지 빈의 일간 <신자유신문> 파리 특파원을 지냈다. 1894년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는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이 사건을 가까이서 지켜본 헤르츨은 유대인이 유럽의 일원으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접고 <유대 국가>라는 책을 써 시오니즘의 깃발을 올렸다. 유대인이 박해받지 않고 살려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에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었다. 헤르츨은 1904년에 세상을 떴지만, 시오니즘 운동은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귀결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헤르츨은 자신의 구상에 따라 태어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또 다른 비극을 낳으리라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다.

1948년 5월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이스라엘 건국의 주역들. 초상화 속 인물이 <유대 국가>로 국가이념의 틀을 제시한 테오도어 헤르츨이다.
유럽이 유대인의 동화 욕구를 수용했다면 오늘의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땅의 전쟁과 참상도 없었을 것이다.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사이 작용-반작용 역학은 다른 여러 정치적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압박과 반발이 교차상승하면서 적대감과 증오심이 쌓인다. ‘헤르츨 효과’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다. 북-미 관계는 이런 작용-반작용 역학의 또 다른 전형을 보여준다. 북한은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 이후로 줄곧 북-미 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평화협정을 통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2000년 6·15정상회담 때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털어놓은 비밀이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1992년 김정일의 특사로 미국 워싱턴에 간 노동당 비서 김용순이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화해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드러낸 일화다.

그러나 북-미 관계는 그 뒤로도 긴장과 위기를 반복했다. 불신과 적대를 키우는 작용-반작용의 정치적 역학이 관계 개선의 계기들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다. 지난 10여 년 사이 북한은 다섯 차례 핵실험을 벌이고 급기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까지 감행했다. 위기를 증폭시키는 이런 악무한이 계속되어선 안 된다.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은 저 먼 팔레스타인 땅에서 전쟁과 참화를 낳았지만, 북-미 사이 충돌은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미국을 모두 설득해 두 나라의 불신과 적대를 풀어내는 조정자 구실을 해야 한다. 남북 대화의 통로를 다시 여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난마의 한복판을 헤쳐나가야 하는 괴로운 일이지만 다른 길이 없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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