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22 17:26
수정 : 2017.08.22 19:24
고명섭
논설위원
1962년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 법정에서 만난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음의 공장’으로 보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에게는 셰익스피어 사극에 등장하는 이아고나 맥베스 같은 악의 화신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사악함도 없었다. 아이히만은 그저 한 단계라도 더 승진하는 데 골몰하는 인간이었다. 따분할 정도로 틀에 박힌 아이히만의 말과 행위에서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었다. 아렌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악의 집행자가 보여준 무사유, 곧 ‘사유할 능력이 없음’이었다. 무사유가 악의 평범성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무사유는 어리석음이나 무식함을 뜻하지 않는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고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을 무식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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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왼쪽)와 예루살렘 재판정의 아돌프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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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에 등장하는 ‘공범자들’에게서 우리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적용한 특징들을 거의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문화방송>과 <한국방송>을 망가뜨리고 ‘공정방송’과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언론인들을 무참히 짓밟은 사람들은 악의 화신들이 아니다. 카메라를 피해 도망가기 바쁘거나 인터뷰를 시도하는 감독 앞에서 입을 꼭 다물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악의 평범함, 아니 악의 누추함이다. 당당함도 자긍심도 없는 이런 사람들이 부당한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언론인들을 온갖 더러운 방법으로 모욕하고 방출하고 해고했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공영방송을 저널리즘의 공동묘지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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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범자들> 중 최승호(왼쪽) 감독과 김재철 전 <문화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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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아이히만은 “내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말하려는 것”이라고, <실천이성비판>의 정언명령을 거의 정확하게 불러냈다. 그러나 아이히만이 그 정언명령의 본질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라는 총통의 명령을 순순히 집행하는 것이야말로 칸트의 도덕원칙을 어기는 행위다. 아이히만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거기서 자부심을 느끼기조차 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특징으로 ‘무사유’를 거론한 것은 이런 ‘판단의 무능력’ 때문이다. 아이히만에게는 명령의 옳고 그름을 따져 옳지 않은 명령을 거부할 줄 아는 도덕적 능력이 없었다. 공영방송의 사장과 이사장 그리고 간부들에게서 이런 무능력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더 위로 올라가면 ‘공영방송 파괴의 주범’인 이명박과 박근혜야말로 ‘무사유’의 전형이다. 권력의 세계에서 어김없이 작동하는 ‘가족유사성의 원리’에 따라 이명박은 이명박을 닮은 자를 방송장악의 도구로 세우고, 박근혜는 박근혜를 닮은 자를 어용방송의 수족으로 부렸다.
아이히만이 칸트를 인용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고귀한 이념도 범죄자가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쓰겠다고 작정하면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라는 이는 ‘문화방송판 블랙리스트’를 사실상 지휘한 사람으로 지목받고는 “정치 활동을 하는 데 방송을 이용하면 안 된다”며 “중립성, 공정성, 독립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저널리즘 가치를 파괴한 장본인이 그 가치를 앞세워 탄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영화 <공범자들>에서 “방송의 미래를 망치지 말라”고 큰소리치는 <문화방송> 최고위 간부의 말이 어처구니없는 것은 바로 이 말을 한 당사자가 <문화방송>을 망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저열한 무사유의 전시장을 비춘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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