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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29 15:44 수정 : 2017.08.29 22:43

권태호
논설위원

#1 여의도 문화방송

1996년 3월13일 저녁. 문화방송(MBC) 노조가 공정보도를 촉구하며 파업을 결의했다. 영등포경찰서를 출입하던 나는, 온종일 노조 사무실을 들락날락했다. 저녁 무렵, 백지연 앵커가 노조 사무실로 쓱 들어왔다.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였다. 92년 파업 때도 동참해 중징계를 받은 바 있다. 노조 위원장과 마주 앉아 시름 깊은 얼굴로 “저는 어떡하나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위원장은 “백 앵커가 결정하세요. (고민) 이해합니다. 부담 주지 않을게요”라 했다. ‘백지연의 파업 참가는 균형추를 바꿀 사안인데, 위원장이 저리 말하면 어떡하나’라고 혼자 답답해했다. 옆에 취재기자 있는 줄 의식도 못 하는 그들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물러나는 그를 뒤쫓아 “내일 파업 참가할 건가요”라 물었다. 눈빛은 당황했는데, 목소리는 차분히 “언제 입사하셨죠?”라는 뜬금없는 질문 되묻고, 답 없이 떠났다. 그는 다음날 <뉴스데스크>에 출연하지 않았다. 당시 노조 위원장은 최문순 강원지사다.

#2 공덕동 양꼬치 식당

2013년 8월28일 저녁. 지금은 세상을 떠난 회사 후배 구본준 기자와 엠비시에서 ‘잘린’ 박성제 기자와 함께했다. 회사는 다르지만 입사 동기라, 경찰기자 시절 취재 현장 곳곳에서 자주 마주쳤다. 덩치처럼, 말뜻 그대로, 저돌적인 기자였다. ‘잘 사냐’는 말에, “잘 산다” 했다. 농담처럼 “박성제가 노조 위원장 하고 잘렸다는 말 듣고, ‘박성제가 그렇게 투사였나’ 놀랐다” 하자, 그는 “내 말이…”라며 껄껄 웃었다. “나는 학교 때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음악 듣고 노는 거 좋아하는 날라리인데, 엠비시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어쩌다보니’ 노조 위원장이 되어, 2012년 파업 배후로 지목돼 해고당했다. 해고 이후, 간간이 글을 쓰고 책도 펴냈다. 현장에서 내밀렸지만, 시각은 날로 매섭다. 그를 보면, 영화 <변호인>과 <택시운전사>의 송강호가 연상된다. 그를 보면, 엠비시에서 벌어진 일이 ‘진보, 보수’가 아닌 ‘상식과 염치’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5년이 지났다. 한때 나는 그가 스피커 제작에 몰두하는 걸 보고, ‘엠비시 복귀는 접고 새 삶을 찾아가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받은 이메일 주소가 ‘psjmbc’(박성제mbc)다. @ 뒷자리에 ‘mbc’가 없다. 아직.

#3 청계광장

2017년 8월25일 저녁. 엠비시, 한국방송(KBS) 직원들이 파업을 다짐하고, 시민들이 응원하는 ‘돌마고(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 불금파티’ 현장.

기자·피디들이 방송현장에서 쫓겨나 누구는 스케이트장 관리원으로, 누구는 출퇴근 7시간 거리 교육원에서 ‘저평가자’ 정신교육을, 누구는 ‘신천교육대’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누구는 파업 현장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다 이빨 깨지고, 갈비뼈 부러진 9년간의 지난 일들을, 누가 방송인 아니랄까 천연덕스레 이야기했다. 그리고 엠비시 해직언론인으로 암투병중인 이용마 기자가 영상통화를 통해 시민들에게 응원을 당부하고, 감사를 표했다. 영화 <공범자들>의 영상이 배경화면으로 깔렸다. 무대 아래에서 많이 미안했다. “지난 정권이 엠비시를 너무 망쳐놓아, 예전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라고, 한가로이 말했던 일이.

세월호 참사로 자식들을 잃은 엄마 아빠들로 구성된 ‘4·16 합창단’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러줬다.

“무엇이 두려우리오/ 그대 곁에 내가 서 있소/ 우리 가는 길 외롭지 않소/ 푸른 산이 저기 보이오.”

‘돌마고’는 9월1일 63빌딩 앞에서 열린다. 계속.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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