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4 18:15
수정 : 2018.01.05 09:56
안재승
논설위원
2014년 12월8일 밤 대한항공은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 회항’에 대한 사과문을 급히 발표했다. 사건 발생 3일 만이었다. 대한항공은 “승객분들께 불편을 끼쳐 사과드린다”고 말한 뒤, “조 부사장이 매뉴얼조차 사용 못 하는 사무장을 하기시킨 것은 임원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승무원 교육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다. 한마디 사과, 그리고 긴 변명과 책임 전가는 국민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나흘 뒤 조양호 회장이 “어리석은 딸을 용서해 달라”며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비판 여론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조 부사장은 구속됐다.
‘배터리 게이트’에 휩싸인 애플이 지난달 28일 사과문을 발표했다. 뉴스 웹사이트 레딧에 ‘아이폰의 고의적 성능 저하’ 의혹이 처음 제기된 지 19일 만이었다. 애플은 “몇몇 고객이 실망하고 있는 데 대해 사과드린다”고 말한 뒤, “이 문제와 관련해 많은 오해가 있으며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후 고객 반응이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고객의 신뢰가 전부이며 결코 돈을 벌기 위해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잘못은 없지만 사과를 한다는 애플의 오만한 태도는 소비자들의 반발만 키웠다. 손해배상 집단소송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국내에서도 참여 인원이 4일 현재 30만명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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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배터리 게이트’와 관련해 최고경영자인 팀 쿡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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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과 애플의 사과는 공통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우긴 것이다. 둘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진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다. 셋째, 일방적으로 자신들을 믿으라고 강요했다. 소비자들을 가르치려 든 것이다. 사과를 하고도 욕을 더 먹은 이유다. 비단 대한항공과 애플만이 아니다. 엑손모빌의 기름 유출 사고와 도요타의 대량 리콜 사태 등 잘못된 사과가 위기를 키운 사례는 많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 그 순간만 모면해보려는 사과는 용서는커녕 분노만 유발하는 역효과를 낸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와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공저 <쿨하게 사과하라>에서 ‘사과의 충분조건 6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사과한다고 말한 뒤 ‘하지만’이나 ‘다만’ 같은 말을 덧붙이지 마라. 변명으로 들린다. 둘째,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라. 과오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셋째, 책임을 인정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라. 사과를 했는데도 상대방이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사과에 책임 인정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충분한 보상책을 제시하라. 피해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면 더할 나위 없다. 다섯째,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 앞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여섯째, 쉽지 않지만 용서를 청하라. 그래야 용서받을 수 있다.
애플은 여기에 몇가지 추가해야 할 게 있다. 먼저 책임자가 나서야 한다. 사과문에 최고경영자 팀 쿡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팀 쿡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배터리 교체 비용을 일부 깎아주기로 한 보상책도 소비자들의 불만을 달래기엔 미흡하다. 무상교환이나 전액환불 같은 충분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팀 쿡은 지난해 1억200만달러(1085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애플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613억달러(65조원)에 이른다. 소비자들의 요구가 과하다고 보기 어렵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사과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울 일이 아니다. 진정성 있는 사과는 문제 해결을 위한 책임감 있는 행동이다.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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