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11 17:35
수정 : 2018.01.1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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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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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규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뽑아 든 ‘개헌 발의 카드’는 ‘일수불퇴’에 가깝다. ‘국민개헌’을 하겠다며 기자회견에서 한 약속이니 쉽게 물리기 어렵다. 물론 그 전에 국회가 개헌안을 내면 대통령이 나설 필요도 없으니 일사천리로 개헌이 추진될 것이다. 하지만 국회가 합의에 실패하면 문 대통령으로선 부담스럽더라도 개헌안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국회는 부결이든, 가결이든 처리를 해야 한다. 국회가 초읽기에 몰린 형국이다.
국회는 4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개헌 논의를 서둘러 2월 말까지 국회 합의안을 낸다. 둘째, 대통령의 개헌안이 공개되면, 동의하는 내용은 수용하고 이견은 수정해 뒤늦게라도 국회가 별도의 개헌안을 마련해 제출한다. 셋째, 여야가 6월 개헌을 포기하되 ‘연내 개헌’ 시기와 범위를 명시적으로 합의한 뒤에 대통령의 수용을 요구한다. 넷째, 이도 저도 무산돼 대통령이 개헌안을 내면 국회는 이를 부결시킨다. 첫째가 최선이고 둘째, 셋째는 차선이며, 넷째는 최악이다. 최악만 피하면 이번엔 어떤 형태로든 개헌이 될 수 있다. 정치는 생물이고, 최선 아니면 차선이라도 택하는 게 정치의 본령이다. 자유한국당이 최악을 선택할 정도로 하수는 아닐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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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자를 지정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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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발의 개헌 정국’을 가늠해볼 수 있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 대통령의 개헌안은 정쟁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지방분권 등 명분 있는 분야에 집중해 여론 지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할 것이다. 구체적인 개헌안 내용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대대적인 논쟁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지지율 70%를 웃도는 문 대통령이 발 벗고 나서면 ‘개헌 체감온도’가 확 올라갈 수 있다.
둘째, 지방분권 개헌을 요구하는 지역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점도 중요하다.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등 ‘지방 4대 협의체’는 2월 말까지 ‘지방분권 개헌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인다. 자유한국당 주요 기반인 영남권도 예외가 아니다. 권영진 대구시장, 김관용 경북지사가 ‘개헌 전도사’로 나선 게 이채롭다.
셋째, 개헌안 표결이 기명투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누가 반대하고 찬성했는지 모두 공개된다는 얘기다. 이는 다음 총선에서도 중요한 판단 근거로 활용될 테고, 개헌 반대표를 찍은 의원들에 대한 낙선운동이 펼쳐질 수도 있다.
넷째, 정부는 개헌안을 마련해도 곧바로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뜸을 들이며 국회에 최후의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 여당인 민주당은 그사이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과 개헌 협상에 속도를 낼 것이다. 자유한국당도 민주당이 다른 야당의 협력 아래 개헌안을 발의하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다. 121석의 민주당이 개헌 발의 정족수(150석)를 채우는 건 어렵지 않다. 다른 야당들이 가세하고 국민 여론이 아우성치는데도 자유한국당이 한사코 개헌을 거부할 수 있을까. 국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참고할 만하다.
이탈리아는 2016년 상원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마테오 렌치 총리는 부결되면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개헌안은 부결됐고, 렌치는 총리직을 사임해야 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배수진을 치고 개헌에 나서면 어느 정도 신임투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야말로 ‘전면전’이다. 문 대통령도 피할 수만 있다면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을 거다. 아직 ‘공’은 국회에 있고, 시간은 충분하다. 국회가 절충과 타협의 예술을 발휘해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주길 소망한다.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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