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16 18:16
수정 : 2018.01.16 20:04
권태호
논설위원
14일 아침, 대형버스 3대가 사람을 기다린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매년 1월14일 추모객들을 동대문에서 마석모란공원까지 데려다준다. 박종철의 대학 친구인 회사 선배와 함께 앉아 ‘박종철’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전해 들으며 공원에 닿았다. 문익환 목사, 계훈제 선생, 조영래 변호사 등 민주·인권·노동 운동가들, 그리고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함께 영면한 곳이다. 박종철 묘역은 공원 북동쪽 높은 곳에 있다. 오르는 길에 박영진 박래전 김귀정 등 한동안 잊고 지낸 이름들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전태일 열사 묘역과 뒤에서 아들을 굽어보는 이소선 여사 묘역 너머 한 걸음 더 오르면 박종철 묘역이다. 응달이라 눈이 수북하다.
좁은 묘역에 200여명이 빽빽이 들어찼다. 김세균 박종철기념사업회장, 이부영 전 의원, 그리고 당시 박종철이 소재를 추궁당했던 그 선배 박종운(57)도 왔다. ‘종철이 몫까지 살겠다’던 박종운은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여러번 선거에 나섰고, 극우성향 매체 <미디어펜> 논설위원을 지냈다. 추모식에는 거의 매번 참석한다. 지난해에는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며 항의받는 소동을 겪었지만, 이날은 추모객 중 한 명으로 녹아 있었다.
식이 1시간30분을 넘겨 눈밭에 묻힌 발끝이 시려왔다. 모두 박종철에게 빚진 자여서, 날이 따뜻했으면 더 면구스러웠을 것 같다. 시작할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고, 끝날 때 <그날이 오면>을 불렀다. 식이 끝나고, 추모객들은 해장국을 함께 먹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도 건넜을 이들에게, 이 식은 ‘우리 잘 살고 있는 걸까’라며 다시 마음잡는 의식과도 같은 것일까.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니’.
이젠 ‘그날’이 온 걸까.
# 남영동 대공분실.
버스는 박종철이 떠난 그 자리로 왔다. 대공분실 바로 앞 호텔 전광판에 ‘타이 마사지 2만원’이란 글귀가 번쩍인다. 대공분실 철제문은 활짝 열려 있다. 1층 실내에서 가파른 나선형 철제 계단이 끝없이 오른다. 박종철이 올랐으나 내려오지 못한 계단이다. 5층에서야 계단은 끝이 난다. 박종철이 스러진 509호실 얼룩얼룩한 검은 무늬 욕조가 흉측하다. 투신 방지 목적의 좁고 기다란 창은 기묘하다. 5층에는 조사실 15개가 있다.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이 고문받은 515호는 복도 맨 끝 방이다. 이철성 경찰청장이 보낸 조화가 놓여 있다. 2년 앞서 이곳에서 고초를 겪은 김 전 의장은 지금 박종철 묘역에서 멀지 않은 모란공원에 있다. 박종철의 형 박종부씨가 1층 마당에서 혼자 눈물을 훔친다. 아직도 남은 눈물이 있을까 싶지만, 31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 아픔이 있나 보다.
경찰청 인권센터인 이곳에는 박종철 사건과 경찰 인권홍보 패널이 나란히 있다. 이종교배처럼 기형적이다. 4층 박종철 전시실에는 생전에 그가 쓰던 물건, 편지가 있고, 경찰 인권홍보 센터인 옆방에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인권옹호 경찰관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는 사진이 큼지막하다. 경찰 사무실이 있는 2~3층은 닫혀 있고, 이날 대공분실은 ‘객’들로 가득 찼다. 이곳은 여전히 ‘경찰’이 주인이고, ‘박종철’은 객이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사회가 운영하는 ‘인권기념관’으로 바꾸라는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30일 동안 20만명 이상 추천한 청원에 대해선 정부가 답하도록 돼 있다. 청원 마감일은 2월1일이다. 16일 오후 2시 현재 8175명이 서명했다.
www1.president.go.kr/petitions/78392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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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1주기 추모식이 열리기 직전, 추모객들이 묘역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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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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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전시실 바로 옆 경찰 인권센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표창장 수여 장면 등의 내용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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