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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18 16:55 수정 : 2018.01.18 20:23

김영희
논설위원

지난주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저희 막달레나공동체는 기나긴 고민 끝에 탈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여러 사업 중 쉼터 사업을 접고 올해부터는 성매매 위기에 노출된 가출청소녀들을 위한 무료진료소 운영과 성매매 예방사업 등에 집중할 것입니다….” 이옥정 대표를 만나러 간 청파동 ‘막달레나의 집’은 18일 합정동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이사를 앞두고 준비에 한창이었다. 쉼터에 머물던 이들은 지난달말 다른 시설로 옮기거나 자립해 나갔다. 1985년, 성매매 집결지였던 용산역 앞 식당 2층의 방 2개에서 시작한 전국 최초의 탈성매매 여성들의 쉼터는 이곳을 거쳐간 여성들의 ‘친정’ 같은 곳이었다.

1985년 전국 최초의 탈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을 설립했던 문애현 수녀(왼쪽)와 이옥정 대표의 최근 모습. 재정 마련을 위해 아이스크림 장사까지 나서는 등 지난 30여년간 ‘환상의 콤비’로 살아온 이들은 올해 88살과 72살이 됐다.
시작은 어느 여름이었다. 매일 용산역 앞을 오가던 보험판매원 이씨는 광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던 아이를 남자 손님이 성추행하는 걸 보고 신고했다. 성매매 집결지에서 성매매 종사자와 그 자녀들이 함께 살던 때였다.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파출소에 가니 엄마 직업이 문제가 됐어요. 업주는 엄마가 수용소에 끌려가게 됐다고 야단이고. 왜 이들이 주눅 들어야 하나 싶었어요.”

전공자도, 전문상담가도 아닌 이씨가 “오지랖 때문에” 용산역 앞에 방을 빌려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자 부탁이 끊이지 않았다. 호적을 찾아주고, 기초수급 신청을 해주고, 아픈 이들 무료병원을 찾아주고, 죽은 이들 장례를 치러주고. “하루에 병원 세곳을 다니고 벽제화장터에서 ‘단골’이라고 맞아주던” 때였다. 공동설립자 문애현 수녀가 있어 가능한 세월이었다. 1953년 한국에 들어온 파란 눈의 미국인 수녀는 이씨를 통해 성매매 여성들을 만난 뒤 85년 보따리를 싸들고 왔다. 가톨릭사회복지회의 도움으로 담당 신부가 된 서유석 신부도 지금까지 함께다. 그렇다고 이들이 ‘선교’를 한 것도, 성매매가 ‘죄’라고 설교한 것도 아니다. “‘하느님도 못 말리는 걸 내가 어떻게 말리냐’ 하곤 했어요. 이미 매일 자기가 죄인이라 여기며 사는 애들이야. 그저 목숨 끊지 않고 잘 살길 바라며 친구로서 조언했을 뿐이죠.” 87년부터 써온 반들반들해진 밥상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이는 자립에 성공하고 어떤 이는 성매매로 돌아갔지만 이씨는 ‘위도 아래도 없는’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을 먹던 기억이 그들에게 힘이 되길 바랄 뿐이다.

막달레나의 집의 시간을 함께 해온 둥근 밥상.
2004년 성매매특별법 제정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탈성매매 여성들도, 사단법인을 꾸린 ‘막달레나공동체’도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됐다. 하지만 누구도 성매매가 사라졌다고 말하진 않는다. 오늘도 단란주점에서 인터넷에서 오피스텔에서 ‘산업화’한 성매매는 번창한다. 지난 2010년 서울대여성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업주에게 쓰던 ‘차용증’은 사라졌지만 강요당한 성형비용·벌금·살림마련비 등으로 사채업자를 통해 얻어야 하는 빚이 억대에 이르는 여성이 적잖다. 성매매 피해자 지원시설 입소자들 71%가 자살 시도를 했고, 절반 이상이 약물복용 경험이 있다는 조사도 있다. 성매매 집결지 또한 다 사라진 건 아니다. 대구 자갈마당, 전주 선미촌 등은 지난해에야 문화거리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전국 최초로 성매매 피해자 등의 자활지원 조례를 제정했던 대구시는 지난해 “왜 그런 여성들에게 돈을 대주냐”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마음만 먹으면 지원제도도 있겠다, 누군가는 의지만 있으면 왜 그 생활을 못 벗어나냐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의지’를 가지도록, 옆에서 기다려주고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33년간 막달레나의 집처럼.

감당할 수 없는 서울 시내 집세와 시대의 변화 앞에서 쉼터를 접으며, 이제 막달레나공동체는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탈성매매 여성들의 상담과 그룹홈, 가출청소녀들을 위한 ‘나는 봄’, ‘박카스 아줌마’라 불리는 노령 성매매 여성들 상담, 군부대 성폭력·성매매 예방교육 사업 등 이들은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꿈을 꾸고 있다. 33년 전 그러했듯, 이들은 또다른 이들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막달레나의 집. 쑥스러워 못 한 말을 지금 전한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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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를 더 알고 싶으면….

고 김수환 추기경은 명절에 몇차례 막달레나의 집을 찾아, 이곳에 머무는 여성들과 함께 윷놀이를 하고 세뱃돈을 나눠줬다. 막달레나공동체 누리집
막달레나의 집이 생기던 당시, 용산역 주변은 삶에 지친 많은 이들의 거처이기도 했다. 용산역 일대 재개발을 앞두고 막달레나공동체는 성매매 종사 여성들과 함께 사진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국내외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후 사진집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2016, 봄날의 박씨)로 묶여나왔다. 지금은 전국에 40여곳에 이르는 탈성매매 여성 쉼터 가운데 ‘최초’였던 막달레나의 집은 성매매 종사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연구자, 자원봉사자들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용감한 여성들, 늑대를 타고 달리는>(1996, 삼인) 같은 연구서가 그 결과물이다. 막달레나의 집의 33년 역사 주인공은 이 대표와 문 수녀뿐 아니라 이곳을 거쳐간 성매매 종사자들이기도 하다. <막달레나, 용감한 여성들의 꿈 집결지>(2010, 그린비)에서 이들의 사연을 만날 수 있다. 청소녀건강센터 나는 봄, 강화교육센터, 용감한여성연구소 등 막달레나공동체가 펼치고 있는 활동은 누리집(magdalena.or.kr)에 자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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