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08 17:20
수정 : 2018.02.08 19:15
임석규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를 각 비서관실에 걸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남에겐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에겐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뜻이니, 참모들에게 뭔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뜻임이 분명해 보였다. 대통령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2년 차 접어들면서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는데, 초심을 잃지 말자는 취지”라며 “추상을 넘어 한겨울 고드름처럼 자신을 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 양정철씨가 쓴 <세상을 바꾸는 언어> 북 콘서트가 열렸다. 지난달 30일에 이어 두번째였다. 박영선·민병두·전해철·박남춘·김경수 의원 등 지방선거 단체장 출마를 고심하는 이들이 참석했다. 박영선 의원은 1, 2차에 모두 모습을 보였다. 양정철과 인연이 각별한 이들이긴 하다. 그래도 세간에선 ‘양정철이 역시 실세’라거나 ‘실세 눈도장 찍으러 간 거 아니냐’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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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1월 30일 양정철씨 북 콘서트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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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행사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참석했는데, 썩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몸 잘 만들어두라”는 임 실장의 의미심장한 당부가 어떻게 해석되겠는가. ‘양정철의 권부 복귀’가 멀지 않았음을 넌지시 암시한 말로 받아들여지는 건 불문가지다. 이 말은 ‘실세 양정철’이란 근거가 불분명한 풍문에 공식성을 부여해버렸다. 양정철이 “난 끈 떨어진 사람”이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믿지 않게 됐다. 그가 이 정권에 지분이 있다는 건 공지의 사실이다. 청와대나 정부에서 중책을 맡아도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슨 망명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국외를 떠도는 모습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진다.
양정철은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홍보기획, 국내언론 비서관을 했다. 물불 가리지 않는 충성심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노무현은 예리한 공격수였다. 몸싸움을 주저하지 않고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며 예측불허의 공격으로 허를 찔렀다. 양정철은 자신이 공격받고 욕먹는 걸 피하지 않았다. ‘최전방 공격수’로 나서 대통령을 보좌했다. 양정철은 ‘노무현표 공격축구’에 더없이 훌륭한 참모로 활약했다.
문 대통령 스타일은 좀 다르다. 세차게 몰아치기보다 조곤조곤 설득하는 쪽을 택한다. 박수현 전 대변인이 ‘실용적 지도자’로 평한 데서 보듯, 문 대통령은 수비수의 면모를 지녔다. 국정운영도 ‘수비축구’에 가깝다. 이 덕분인지 10개월 차 접어든 국정이 비교적 안정적인 항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수비축구는 방심하면 위험하다. 공격수는 열번을 헛발질해도 한번만 넣으면 되지만, 수비수는 열번을 선방해도 한번만 실수하면 만회할 방법이 없다. 정권 초반엔 다들 조심조심하지만 갈수록 조였던 경각심의 나사가 풀리기 마련이다. 문 대통령이 ‘춘풍추상’ 액자를 돌려 참모들에게 ‘고드름 처신’을 주문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문 대통령이 ‘대선 1등 공신’ 양정철을 곁에 두지 않은 데엔 뭔가 심모원려가 있을 거다. 어떤 직책을 맡겨도 그에게로 힘이 쏠리면서 시스템이 무너지는 걸 우려했을 수 있다. 정권 때마다 입길에 올랐던 ‘왕수석, 왕비서관, 왕참모’를 없애겠다는 의도도 작용했을 법하다. 공격에 능한 ‘양정철 스타일’이 ‘문재인 수비축구’엔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거란 짐작도 해본다. 그래도 양정철이 필요하다면 언젠가 대통령이 부를 날이 올 거다. 그때까지는 국외자로 남아 있겠다고 몇번씩 다짐하는 양정철을 주변에서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양정철은 죄가 없다. 그를 ‘실세’로 떠받드는 이들이 문제다.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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