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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13 18:18 수정 : 2018.03.13 19:01

임석규
논설위원

2007년 7월 미국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 오벌오피스. 크리스토퍼 힐 대북정책조정관이 조지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에게 북핵문제와 6자회담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체니는 내내 졸기만 했다. 힐은 “이라크를 침공하면 바그다드 거리에 장미꽃잎이 뿌려질 것”이라고 오판한 사람이 체니였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메디치미디어)의 한 토막이다.

미국 눈 밖에 났다가 제거된 사람은 이라크 사담 후세인뿐만이 아니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미국과 관계 개선을 추진하며 고농축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 개발 계획 포기’를 선언했다. 미국이 요구한 검증 방안도 수용했다. 하지만 정권이 무너졌다. 2011년 3월 북한 외무성은 리비아 사태의 본질을 ‘안전 담보와 관계 개선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속여 무장해제시킨 다음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방식’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8개월 뒤인 그해 11월 카다피가 반군에 사살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부시-체니 조합’에 뒤지지 않는 강경파다. 북한으로선 역대 어느 팀보다 두려운 상대다. 미국에 대한 북한의 공포를 도외시하면 한반도 정세 급변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카다피의 몰락에서 북한은 수교나 협정도 안전을 담보해주진 않는다는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보수 진영은 북한의 비핵화 얘기를 못 믿겠다고 한다. ‘시간벌기용 속임수’ ‘궁지에 몰린 김정은의 안보쇼’(홍준표)로 규정한다. 그러니 ‘들뜬 트럼프’(조선일보)가 ‘김정은의 사기극’에 당하는 거로 비치는 거다. 기존의 관성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만 보일 거다. 제트기의 속도로 변하는 정세를 완행열차의 시선으로 보면 착시에 빠져 뒷북칠 수밖에 없다.

한반도를 넘어 세계사적 대전환의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변화다. 과감한 발상 전환과 창의적 관점이 절실한 시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항구적 평화체제, 남북 공동번영’이란 3대 목표를 제시했다. 비핵화에 그치지 않겠다는 얘기다. 비핵화만 돼도 커다란 성과겠지만 더욱 원대한 비전을 현실화할 기회가 열리고 있다. 문 대통령이 ‘비핵화 중매자’를 넘어 통일로 가는 다리를 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항구적 평화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보수 진영은 여전히 ‘비핵화면 된다’고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비핵화는 핵을 걷어내는 데 그칠 뿐 적대적 대치의 종식은 아니다. 그런 ‘소극적 평화’에 안주할 일이 아니다. 한 발짝 더 나가 ‘남북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 일이 진행되는 속도를 보면 비핵화는 출구가 아니라 입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북한의 호응 없이는 불가능한 꿈이다. 북한은 아직 비핵화의 구체적 반대급부가 뭔지 드러내지 않고 있다. 뭉뚱그려 ‘체제 안전보장’을 요구하는데, 북-미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북한이 수교나 평화협정보다 더욱 확실한 ‘체제 안전보장 카드’로 여기는 게 뭘까. ‘중매자 문재인’의 역할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부분이다.

문 대통령에게 6·15공동선언 2항에서 실마리를 찾아보길 권한다. 당시 남북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연합제든, 연방제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남북이 적대적 군사 대치를 끝내고 어깨동무하며 잘 지내는 동안엔 최소한 미국의 침공을 받지 않을 거라고 북한은 판단하지 않을까. 비핵화가 아니라 ‘항구적 평화체제’가 열쇠다.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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